(부산=NSP통신 허아영 기자) = [편집자 주] 월간문학(月刊文學)이 全日신문 동경특파원을 지낸 시인이자 수필가 월포(月浦) 박정희 선생의 인생 스토리를 담은 에세이 ‘그리운 시절 마이 러브 마이 라이프’를 발간했다.
박 선생은 이 책 속에 한국과 일본 두 나라에 얽힌 그의 가족사를 통해 두 나라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속에 지내왔다는 것을 작게나마 알리려는 노력을 담았다.
당사는 비록 작은 개인사, 가족사에 불과할지라도 결국 작은 가족사들이 모여 한 나라의 흐름이 결정되지는 않을까 하는 저자의 마음을 담아 이를 연재한다.
[구슬치기 대장(전편)]
초등학교 시절, 나는 구슬치기를 몹시 잘 하였다.
가히 온 동네 구슬치기 대장이라 할 만했다. 때문에 호시탐탐 내 자리를 넘보는 도전자들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 학교 공부가 끝나고 나면, 도전자들은 주머니 가득 담아온 구슬을 내보이며 결연한 얼굴로 한 판 붙어보자며 큰 소리를 치곤 했다.
그러면 나는 왕좌에 앉은 사람들이 지을 수 있는 느긋한 미소를 띠며 책보에 넣어 두었던 구슬들을 천천히 꺼내어 보여 주었다. 벌써 구슬뭉치의 크기부터가 다른 녀석들과는 한참이나 차이가 났다.
보란듯이 그 구슬뭉치를 흔들며 짤랑짤랑 소리를 내면, 도전자들의 얼굴에는 ‘괜히 나섰나’ 하는 후회의 표정이 어리곤 했다.
그러나 사나이 체면에 먼저 칼을 뽑았다가 한 번 휘둘러보지도 않고 도로 칼집에 넣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던가. 처음 도전해올 때의 기백은 다 어디로 갔는지, 녀석들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와의 구슬치기 대결을 시작했다.
결과는 보나마나였다. 나의 믿음직한 구슬들은 나비처럼 날아 도전자의 구슬을 벌처럼 쏘아 맞혔다. 한 번 손가락을 튕길 때마다 내 구슬뭉치는 더욱 두둑해져 갔다. 나에게 구슬을 모두 내놓고 분에 못이겨 우는 녀석들도 여럿이었다. 그러나 승부의 세계는 냉정한 것이었다.
나는 우는 녀석들을 뒤에 남겨둔 채, 의기양양하니 어깨를 쫘악 펴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 오늘 내가 따 온 온갖 구슬들을 자랑스럽게 보여드렸다. 한 가운데 작은 꽃무늬가 들어간 꽃구슬, 손에 쥐면 기분 좋게 묵직하던 쇠구슬, 코발트빛으로 빛나던 빛깔 고운 구슬 등이 두 손 가득이었다. 두 분은 으스대는 내 태도가 재미있으셨는지 미소만 지으셨다.
그러나 꽃도 한 철이요 달도 차면 기운다고 했던가. 승승장구하던 내 구슬치기 앞길에 강력한 경쟁자가 나타나고야 말았던 것이다. 녀석의 이름은 말남(末男)이었다. 처음 구슬치기를 시작할 때만 해도 한 번 이기기는커녕 하루가 멀다 하고 다른 녀석들 구슬 보태주는 좋은 일만 하던 친구였다.
그러다 더는 구슬치기에 끼지 않길래 포기한 줄로만 알았는데, 그 사이 뒷산에 들어가 도라도 닦고 나온 것인지 그 실력이 몰라보게 좋아져 있었다. 예전의 말남이를 생각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나섰던 녀석들은 줄줄이 나가 떨어져 그 동안 소중히 모아온 구슬을 몽땅 내 놓는 기막힌 일을 당했다.
그런 녀석이 한 둘이 아니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런 일을 겪은 친구들의 반응이 대부분 비슷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말남이 정도는 손쉽게 이길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거들먹거리며 나섰다가, 자신의 구슬이 하나둘 말남이에게 넘어가기 시작하면 "좀 늘었는데, 그래도 이제부턴 어림없지" 하는 경계의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다 결국 말남이에게 지고 마지막 남은 구슬 하나까지 모조리 넘겨주고 나면, 얼이 빠져 꿈인지 생시인지도 구별이 잘 안가는 눈치였다. 그러다 갑자기 말남이가 반칙을 했다며 펄펄 뛰기 시작했다. 반칙을 저질렀으므로 이번 경기는 무효이고, 말남이가 가져간 자신의 구슬을 모두 돌려줘야 한다며 억지를 부렸다.
그러나 누구 하나 거들어주는 녀석이 나오지 않으면 결국엔 풀이 죽어 버리거나 급기야는 울음을 터뜨렸다. 무슨 약속이라도 한 듯, 대부분의 아이들이 패배를 받아들이는 순간까지 비슷한 과정을 겪었다. 그런 친구들을 보며 나는 참으로 사나이답지 못한 녀석들이라며 속으로 비웃었다. 실력이 모자라 시합에서 진 것을 두고, 상대방이 반칙을 했다며 무효를 주장하는 것은 보기 좋은 일이 아니었다. 나는 내 생각이 제법 어른스럽다는 것에 뿌듯해하며, 언젠가 말남이가 나에게 도전해 오면 보기 좋게 콧대를 꺾어주고 친구들의 우러름을 받으리라 다짐하였다. 그리고 그날은 머지않아 찾아왔다.
쉬는 시간, 책을 읽는 내 앞으로 누군가가 다가와 섰다. 고개를 들어 보니 다름 아닌 말남이가 아닌가. 말남이는 자신의 구슬 보따리를 내 보이며 말했다.
"오늘 학교 끝나고, 운동장에서 보자."
시끄럽게 떠들던 친구들이 우리 둘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사뭇 긴장한 표정으로 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오냐, 좋다. 너 이 녀석, 내 실력을 확실하게 보여주마. 속으로는 경쟁심이 확 일었지만, 나는 왕좌에 앉은 이답게 별 것 아니라는 듯 느긋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럴까? 그럼 있다 보자."
황야에서 결투를 벌이는 무법자들이 우리처럼 비장했으랴. 까까머리 코흘리개들이라고 무시하면 안 된다. 구슬치기에서 이기느냐 지느냐에 우리의 명예가 걸려 있었다.
남은 시간 내내, 같은 반 사내 녀석들은 어서 나와 말남이의 구슬치기 시합을 보고 싶은 마음에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조바심을 냈다. 어수선한 분위기를 선생님도 눈치 채셨는지, 오늘따라 왜 이리 부산스럽냐며 몇 번이나 주의를 주셨다. 그럴 때마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띠며 결전의 시간을 위해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마침내 학교 공부가 모두 끝나고 나자, 나와 친구들은 기다렸다는 듯 운동장 한 구석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친구들은 다들 내가 자신들의 치욕을 되갚아 주길 바라며 한 마디씩 훈수를 두었다.
"정희야, 엄지를 이렇게, 응? 이렇게 힘을 줘서 튕겨야 돼. 알았지?"
"야, 잘난 척 하지 마. 정희가 그 정도도 모를까봐 그러냐?"
"그러는 너는 그 정도나 아냐?"
저희들끼리 신이 난 친구들을 보며, 나는 왜 이리 별 것 아닌 일에 흥분하느냐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만큼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말남이는 벌써 와 기다리고 있었다. 녀석의 편에 선 친구는 한 녀석도 없었다. 다들 내 뒤에 졸개들처럼 붙어 내가 말남이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작할까?"
"좋아!"
"정희야, 힘 내!"
"본때를 보여 줘!"
"구슬을 몽땅 뺏어 와야 돼!"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나를 응원하던 고함으로 시끄럽던 운동장 한 구석은 쥐 죽은 듯 조용해져 있었다.
나를 비롯해 친구들 모두는 아직 사태파악이 안 된 표정으로 얼이 빠져 있었다. 내가 그 동안 차곡차곡 따 모았던 귀한 구슬들이 모조리 말남이의 손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야, 정희야, 너 왜 그랬어."
"그러니까 내가 뭐랬어. 엄지손가락에 이렇게, 이렇게 힘을 줘야 한댔잖아."
아이들은 내 눈치를 보며 위로인지 놀림인지 모를 말들을 한 마디씩 던지더니, 말남이 쪽으로 슬금슬금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퍼뜩 정신을 차려보니 뒤에 서 있던 녀석들이 대부분 나를 마주 보고 있었다. 갑자기 속에서 불길이 확 일었다.
"바, 반칙이야! 말남이 너 이 자식! 분명 반칙했잖아!"
"실력이 모자라 시합에서 진 것을 두고, 반칙이라며 무효를 주장하는 것은 보기 좋은 일이 아니다."라고 했던 건 누구였을까. 아무래도 나였던 것 같은데, 그 순간만큼은 까맣게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야, 너 말남이가 언제 반칙했다고 그래."
"그래. 네가 못해서 진 거잖아."
이래서 패자는 말이 없어야 한다고 했나보다. 나의 억지 주장은 도리어 친구들의 반감만 사고 말았다. 나의 한 시대가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nsplove@nspna.com, 허아영 기자(NSP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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