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NSP통신 안정은 기자) = [편집자 주] 월간문학(月刊文學)이 全日신문 동경특파원을 지낸 시인이자 수필가 월포(月浦) 박정희 선생의 인생 스토리를 담은 에세이 ‘그리운 시절 마이 러브 마이 라이프’를 발간했다.
박 선생은 이 책 속에 한국과 일본 두 나라에 얽힌 그의 가족사를 통해 두 나라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속에 지내왔다는 것을 작게나마 알리려는 노력을 담았다.
당사는 비록 작은 개인사, 가족사에 불과할지라도 결국 작은 가족사들이 모여 한 나라의 흐름이 결정되지는 않을까 하는 저자의 마음을 담아 이를 연재한다.
[적벽가와 옛 이야기에 능하신 진주 한량, 나의 외할아버지 (전편)]
나의 외할아버지는 성정이 부지런하고 깔끔하셨으며 인심 또한 후덕하신 분이셨다. 맏딸이 맡기고 간 어린 손주를 금이야 옥이야 아껴 주시며 누운 자리가 차지는 않은지, 먹는 것이 적지는 않은지, 하는 생각과 행동은 올바른 것인지를 늘 챙겨주시던 나의 외할아버지. 새삼 그분에 대한 그리움의 정이 솟아오르는 것을 막을 길이 없다.
외할아버지는 그 후덕함을 가족들에게만 베푸신 것이 아니었다. 일본에서 가져오신 토마토와 양파 오이 가지 등의 채소 씨를 뿌려 그 열매가 영글면 마을 사람들에게도 골고루 나눠 주시곤 하셨다. 마을 사람들은 생전 처음 보는 맛나고 물 많은 채소를 몹시 좋아했고 그 답례로 감과 무화과를 한 광주리 담아 돌려줬다. 이웃과 사이가 좋았음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또한 외할아버지는 머리 가득 이를 이고 다니던 아이들을 불러 모아 놓고 바리캉을 꺼내 손수 머리를 깎아 주시기도 했다. 그 바리캉은 일본에서 떠나 오실 때 짐 한 켠에 넣어 가져오신 것이었다. 나를 비롯해 동네 사내아이들은 외할아버지 손에 들린 바리캉 한 번만 거치면 준수한 미남들이 돼 까까머리를 문지르며 나오곤 했다. 아이들 머리털 속에 얹혀살던 이들한테는 안된 일이지만 막 머리를 깎고 나올 때의 시원함이란 한 여름 개울에 뛰어들어 멱을 감을 때처럼 청량하기 그지없었다.
친구 녀석들과 동네들 휘저으며 한바탕 뛰어놀고 들어와 호롱불 아래 점잖이 앉아 책을 읽을 때면 할아버지는 또한 내 곁에 앉으셔 화선지를 펴고 먹을 가셨다. 정신없이 책 속에 빠져 있다 문득 정신을 차리면 어느새 흰 종이 위에는 나비가 꽃을 찾아 날고 커다란 호랑이가 해학적인 표정을 지은 채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그림을 보고 좋아하면 할아버지 또한 흐뭇해하시며 손수 깎으신 내 까까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아무리 길어내도 끝이 없을 만큼 할아버지의 속정은 깊고도 깊었다.
어느 날엔가 할아버지는 내 손을 꼭 붙잡고 일찍 길을 나서셨다. 장이 서는 날이었던 것이다. 집에서 시오리 떨어진 삼천포에 장이 설 때면 인근 사람들이 모두 모여들어 시끌벅적해지며 그야말로 장날 분위기가 흠뻑 나는 곳이 됐다.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는 시장이었다. 물자가 귀하던 시절 나는 가지각색의 물건을 구경하고 엿이라도 하나 얻어 빨아먹을 수 있는 장날을 손꼽아 기다리곤 했다. 할아버지 또한 장날을 고대하셨는데 다리쉼도 할 겸 주막에 들러 쭉 들이키는 진한 막걸리 한 잔이야말로 할아버지 낙 중에 낙이었던 것이다. 물론 삼천포 시장에 예전 할아버지의 술잔을 채워주던 섬섬옥수 고운 기생의 손은 없었다. 그러나 인심 좋고 몸매 푸진 바다 아주머니의 마디진 손이 찰랑찰랑하니 넘치는 막걸리를 턱하니 놓아주면 목젖을 꿀꺽꿀꺽 울리시며 맛나게 잡숫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막걸리 몇 잔에 얼큰하게 취기가 오르면 흥이 나신 할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목청을 돋우어 예전 한 가닥 하시던 흥취를 뽑아내어야 또 직성이 풀리셨다.
“공명이 그제야 놀랜 체허고 의관을 정제(整齊)헌다. 머리에는 팔각윤건(八角輪巾) 몸에는 학창의로다. 백우선(白羽扇) 손에 들고 당하에 내려와 현덕을 인도하야 예필좌정(禮畢坐定)후에 공명이 눈을 들어 현덕의 기상을 보니 수수(秀粹)한 영웅이요 창업지주(創業支主)가 분명허고......”
흥정 붙여 물건 사고팔랴, 안부인사 나누랴, 시비 붙어 싸우랴 정신없이 활기찬 시장바닥에 막걸리로 목을 푼 할아버지의 카랑카랑하고 구성진 적벽가 한 대목이 흘러넘치던 것을 나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그 목소리는 창창하고 기상은 반듯하여 꿀릴 것이 없었으니 지난날 비단 두루마기를 입고 기방을 출입하던 풍채는 간 곳 없어도 사람들을 불러 모으던 그 흥에 겨운 모습만은 그대로라 할 만했다. 아직 삼국지를 읽기 전이라 조조와 공명의 이야기를 잘 알지 못하던 나는 할아버지의 노랫가락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지나던 사람들도 발걸음을 멈추고 할아버지가 풀어내는 영웅호걸들의 걸출한 한 판 승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는 배기지를 못했다.
“그대는 삼천군 거나리고 오림(烏林) 갈대숲에 둔병매복(屯兵埋伏)을 허였다가 조병(曺兵)이 지나거든 내닫지 말고 선군(先軍) 지나거든 불 놓아 엄살(掩殺)하야 사로잡아라!”
“거 좋구나!”
“얼쑤!”
노랫가락이 절정에 오르면 듣던 사람들도 흥에 겨워 추임새를 넣었다. 더욱 흥이 나신 외할아버지는 컬컬한 목을 막걸리 한 잔으로 축이신 뒤 나머지 노랫가락을 연이어 부르신 후에야 비로소 끝을 맺곤 하셨다. 그러고 나면 그 노래를 다 들은 사람들은 아직도 흥에 겨운 발걸음을 갈지[之]자로 내딛으며 쌈짓돈 풀어 사들인 소중한 세간이며 귀한 먹을거리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노래의 재미도 재미거니와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할아버지의 재주에 나는 절로 두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우리 할아버지만큼 멋진 분이 또 있으랴 싶었다.
그렇게 한 판 신명나게 적벽가를 부르신 할아버지는 다시 내 작은 손을 꼭 붙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옮기셨다. 신기한 구경에 구성진 노래에 재미난 이야기에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나는 흐뭇한 기분으로 할아버지를 따라 나섰다. 그때,
“어르신, 그 소리가 장히 좋소.”
생전 처음 듣는 목소리가 할아버지를 불러 세우는 것이었다. 할아버지도 나도, 놀라 그 부른 이를 돌아봤다. 나로선 알지 못하는 여인이 처연히 웃고 있었다.
“어르신, 나를 모르시겠소.”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어 할아버지와 그 여인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봤다. 희게 분칠하고 붉은 입술연지를 발랐으나 고단한 삶의 흔적마저 다 감추지는 못한 고우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시들어 버린 느낌을 주는 얼굴이었다. 우리 할아버지가 이런 사람을 알았던가.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할아버지 역시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는 그 얼굴을 기억해 내려 애 쓰시는 눈치였다.
“야속하오. 진주기방에서 소리하던 나를 모르신단 말이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할아버지가 안타까웠던지 여인은 스스로 제 이름을 말했다. 매향이라 했던가 매월이라 했던가. 꽃 이름이 들어갔다는 것만 희미하게 떠오를 뿐 그 이름 전부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이름을 듣는 순간 할아버지의 주름 진 얼굴에 반가움의 기색이 떠올랐다 사라졌다는 것만은 분명히 기억한다. 예전 마주 앉아 소리를 하고 듣던 이를 만났으니 못내 반가우면서도 기방의 꽃이요 뭇 사내를 애태우던 그 곱던 얼굴이 세월의 풍상에 깎여 빛을 잃은 것이 안타까우셨던 까닭이리라.
“자네, 어찌 이곳에 있는가.”
“어찌 있긴요. 전쟁 통에 기방이 다 뭐랍니까. 뿔뿔이 흩어져 제 살 길 찾아간 것이죠. 어르신이야말로 많이 늙으셨습니다. 부잣집 도련님 좋던 행색은 다 어디 두시구요.”
주거니 받거니 할아버지와 그 여인은 몇 마디 지난 이야기를 나누셨다. 돌이켜 보면 참으로 구슬픈 마주침이나 어렸던 나는 그런 것을 알지 못했다. 다만 헤어질 때 그 여인이 내 손에 커다란 눈깔사탕 몇 개를 쥐어준 것만 기억날 따름이다.
“네 얼굴이 젊을 적 어르신을 닮았구나.”
나는 부끄러워 아무 말도 못하고 손에 쥔 눈깔사탕만 내려다 봤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두 분의 만남은 그렇게 짧게 끝이 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시오 리의 길 위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할아버지와 나를 터벅터벅 따라왔다. 한 판 흥겨운 소리에 기운이 달리신 까닭일까 한참을 말이 없으시던 할아버지는 조용히 내 이름을 부르셨다.
“정희야.”
다음편에서 계속...
annje37@nspna.com, 안정은 기자(NSP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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