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NSP통신] 강은태 기자 = 조성목 금융감독원(이하, 금감원) 저축은행검사1국장은 사채는 인류의 탄생과 함께 끈질기게 존재해 왔으며, 우리나라의 경우 외환위기를 맞아 저신용계층이 증가하는 가운데 이자제한법마저 폐지되면서 사채가 더욱 확대되는 계기가 됐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NSP통신은 사채의 유형과 특징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서민금융 전문가로 머니힐링의 저자인 조성목 금감원 국장의 두 번째 기고문을 통해 사채의 기원과 성장에 대해 알아본다.

◆ 인류와 함께 탄생한 사채 기원은

사채(私債)는 개인과 개인끼리 맺는 지극히 사적인 거래이기 때문에 그 범위가 방대하고 포괄적이다. 그리고 그 기원에 대해서 분명하게 밝혀진 바는 없지만 성경 출애굽기 22:25에 보면 ‘네가 만일 너와 함께한 나의 백성 중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거든 너는 그에게 채주(채권자) 같이 하지 말며 변리(이자)를 받지 말 것이며’라고 기록되어 있다.

출애굽기는 모세가 기원전 1513년 이집트를 떠난 뒤 1년 후인 1512년 사해 근처 광야에서 기록했다는 것이 학자들의 정설인 것을 보면 사채는 지금으로부터 약 3500여 년 전에 이미 인류 사회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좀 더 최근의 사채에 관한 흥미 있는 기록으로는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Adam Smith)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주창한 공리주의자 벤담(Jeremy Bentham)이 1784년에 벌인 ‘대금업에 대한 변호’와 관련한 논쟁을 들 수 있다.

이때 스미스는 이자를 보통 상품의 가격과는 다른 것으로 여겼다. 그는 은연중에 적정이자라는 개념을 갖고 있었으며, 지나치거나 과도한 이자에 대해서는 정부규제가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대부분의 지식인들처럼 대금업은 정당하지 못하며, 대금업자는 나쁜 사람이라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벤담은 이자 역시 상품의 가격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고 법정이자율처럼 법으로 이자율을 규제하는 것은 한마디로 난센스라고 일축했다.

특히 그는 이자율 규제가 가져오는 폐해와 그 부당성을 조목조목 사례를 들어가면서 반박했다.


◆우리나라 사채의 기원과 성장

사채의 기원에 대해 이런저런 추측들이 많은데, 그중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은 ‘쌀’을 대상으로 한 사채의 기원에 대한 설명이다.

아득히 먼 옛날, 농경시대에 살던 우리 선조들은 사회 구조상 대다수가 농사일에 종사했고 양곡 중 특히 쌀은 재화가치가 높은 현물로 취급 됐다.

왜냐하면 쌀은 부피에 비례해 값어치가 높았고 거의 모든 거래에 있어 쌀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채는 쌀이 급하게 필요한 누군가가 쌀을 보유하고 있던 누군가에게 이자 역시 쌀로 지불한다는 계약을 맺고 융통한 방식으로, 전적으로 쌀에 의존해 사채거래가 이루어졌다.

그래서 보통 소작농이 땅의 실소유자인 대지주에게 이러한 사채를 부탁했는데, 가을 수확기에 추수할 쌀의 일정 부문을 이자로 지불할 것을 약속해야 했다.

쌀을 빌려주는 입장의 대지주는 해당 소작농의 땅에서 생산되는 쌀의 양을 파악하고 있어, 떼일 염려가 없을 정도의 양만을 빌려주기 때문에 틀림없는 회수가 가능했다.

쌀을 빌려가는 소작농의 경우에도 빌린 쌀을 갚지 않으면 다음 해에 소작을 할 수 없으니 반드시 쌀을 갚아야만 했다.

이러한 틀 속에서 안정적인 거래가 가능했기 때문에 쌀 사채는 널리 성행해 춘궁기와 수확철의 거래를 활성화시켰다.

조선 후기 영·정조 시대에 공무역을 보완하던 사무역이 밀무역 성격을 띠면서 난전(亂廛)과 함께 지하경제를 키웠다.

당시 중인층은 지하경제 독점으로 부를 축적해 신분상승을 위한 자금 등으로 사용하며 세를 과시하기도 했다.

일제 말기에는 암거래 꾼 (야미토리히키, 暗取引)꾼이라는 말이 성행했고 이는 물자난이 극심한 상황에서 물자 암거래로 많은 이익을 남기는 장사꾼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광복 직후 무담보신용대출의 고리대금업인 ▲사설무진(私設無盡)이 있었고, 한국전쟁 이후 번창한 ▲사설계(私設契), 1950년대 후반부터 등장해 60~70년대에 번성한 ▲전당포 등이 대표적이다.

◆ 6‧25전쟁 이후 우리나라 사채 시장의 성장

오늘날 사채는 6‧25전쟁 이후 북한의 평양, 함흥 등지에서 서울의 명동으로 월남하여 남대문 시장의 상인을 대상으로 시작됐고 이른바 암달러상에 의해 형성됐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암달러상은 미군부대 유출 물품을 구매하는 상인에게 하루 10%의 이자로 구매자금을 빌려주었고 이후 시청, 종로, 동대문 등으로 확대되면서 본격적인 사채시장이 전국적으로 파급됐다.

초기에는 월 2~3푼(부)의 이자가 정착되면서 직업적인 전문 사채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는 것이 통설이다.

1970년대 들어 경제개발이 본격화되고 기업의 자금수요가 급증하면서 사채의 “명동시대”가 개막됐다.

당시 제도권 금융기관의 자금은 정부 주도의 국가경제발전 계획에 따라 특정 부문과 기업에 투입됐던 만큼 나머지 기업들은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었고 시중금리의 몇 배를 얹어주고라도 사채시장을 기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렇다 보니 명동 사채시장은 급성장했고 종로, 광화문에도 사채시장이 형성됐으나 명동 시장의 보조적 역할에 머물렀다.

전당포식(담보대출) 운영으로 전주(錢主)들이 손쉽게 거금을 벌었고, 이 사채시장의 ‘큰손’들은 기업의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기업들을 쥐락펴락했다.

전주(錢主)가 있고, 돈을 구하려는 기업들이 있는 사채시장에서 활어와 같은 살아있는 정보가 오가고 기업은 다시 재평가됐다.

거액의 자금이 오가기 때문에 사채시장에는 정보가 넘쳐날 수밖에 없었다.

부동산 담보대출 및 일수를 비롯한 각종 신용사채, 어음 당좌 등은 1980년 초중반부터 성행했고, 금용기관과 신용카드회사의 대출 중개 또는 신용카드 관리 업무는 1990년 초 일부 업체에서 시작해 급격한 성장세를 보이게 된다.

◆ 사채가 갖는 특징은

사채를 바라보는 시선은 이중적이다. 한마디로 ‘양날의 칼’이다.

중소기업과 서민들로부터 고리의 이자를 착취해 전주의 배를 불린다는 부정적인 시각이 많지만 은행 등 제도금융권에서 소외받거나 일시적으로 자금애로를 겪는 중소기업과 서민들에게는 급전을 융통할 수 있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며칠 있으면 물품판매대금으로 확실하게 입금될 돈이 있는데 자금관리를 잘 못해 지금 당장 돌아온 어음을 막을 수 없는 중소기업이라면 높은 이자에 불구하고 돈 빌려주는 사채업자가 고마울 것이기 때문이다.

은밀히 이루어지는 지하경제(Black Economy)는 마약밀매, 성매매, 고액불법과외 등 세원을 노출시키지 않는 거래를 말하며 사채가 대표적인 지하경제 거래유형이다.

이 같은 불법적 경제활동은 문서가 아닌 구두로 거래하고, 현금으로 결제하는 특성을 갖고 이들 거래는 불법이기 때문에 국내총생산(GDP), 실업률, 조세 같은 공식적인 경제통계에는 전혀 잡히지 않는다.

거래 내용이 포착되지 않기 때문에 세금 부과대상에서 빠지고, 국민경제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다.

따라서, 지하경제의 과실은 고스란히 소수의 몫이 되고, 자금 흐름의 선순환을 막기 때문에 공식 경제를 좀먹게 되고 지하경제 비중이 높으면 소득불균형이 심화되고 공공서비스 수준이 낮아진다.

오랜 역사를 가진 사채만큼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는 것은 없다. 더 지능적이고도 다양하게 겉옷을 갈아입으면서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예전과 달리 자신이 번만큼 쓰는 시대가 아니라 자신의 잠재적인 소득을 미리 내어 쓰는 가불인생을 살 수밖에 없는 현대인들은 이 사채의 덫에 더 잘 걸리고, 심지어는 자발적으로 들어가 사로잡히는 경우가 많다.

◆ 우리나라 사채시장의 성장은

1997년 외환위기가 발생하면서 다시 사채업의 부활이 예고됐다.

당시, 많은 은행과 제도금융권이 파산상태에 이르게 되면서 신용도가 낮은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지 않게 된다.

돈 을 빌려주더라도 이자제한법에 정해진 상한 이자율(연40%)을 상회한 매우 높은 이자를 받는 경우까지 생기게 되었다.

이때 IMF는 자원의 효율적배분이라는 명분하에 1961년부터 존재하던 이자제한법 폐지를 권고하게 되고, 마침내 1998년 1월, 이자제한(당시 법정 상한이자 연 40%)이 폐지되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이런 호조를 틈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외국계 대금업체들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무주공산과 다름없게 된 우리나라에 대거 진입하여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한 돈놀이가 시작되면서 사채시장은 더욱 팽창하게 된다.(다음 회에 계속…)


NSP통신에 칼럼을 기고한 조성목 금감원 저축은행검사국장은 충남부여 출생으로 강경상고, 경기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연세대학교 경제대학원 졸업, 고려대학교 컴퓨터정보통신대학원·서울대학교 경제연구소 세계경제최고전략과 과정 수료하고 한국은행, (구)은행감독원, (구)신용관리기금, (구)상호신용금고, 금융감독원 서민금융 지원실장 등을 거처 현재는 금융감독원 저축은행 검사1국장으로 저축은행 검사업무를 총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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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태 NSP통신 기자, keepwatch@nsp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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