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NSP통신] 강은태 기자 = 한면희 창조한국당 대표는 우리 정치사회를 떠받치고 있던 제1정치와 제2정치의 자유와 평등가치는 우리사회 시민들의 보편적 행복을 완성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그 이유 중 하나로 우리사회에 내재한 정의의 불균형을 지적했다.
따라서 NSP통신은 지난 2월 21일 한면희 창조한국당 대표와 진행한 단독 인터뷰를 통해 우리사회에 내재한 정의의 불균형을 해소할 새로운 가치인 한면희 창조한국당 대표가 정의하는 제3정치 가치가 마이클 샌들이 주장한 정의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설펴봤다.
◆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책 내용이 선풍적 인기가 있는 이유
2010년 여름 무렵이다.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의 ‘정의란 무엇인가’란 저서가 서점가에서 1위를 차지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가볍게 읽는 에세이나 소설이 아닐뿐더러 돈을 벌게 해주는 경제 서적도 아닌데, 거의 1년 가까이 베스트셀러가 돼 전 국민에게 회자됐다.
샌델이 다양한 실제 사례를 동원해 정의에 대해 비교적 쉽게 서술하고 있지만, 여전히 정치철학의 이야기라서 결코 쉬운 글은 아니다. 인문학 서적이, 그것도 가장 까다로운 철학 서적이 장기간에 걸쳐 베스트셀러 지위를 유지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임에 분명하다.
그렇다면 술술 읽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닌 책이 오랜 동안 유명세를 타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 몇 가지로 짚어볼 수 있다. 여기서는 ▲정치적 요인 ▲교육적 요인 ▲사회적 요인으로 꼽아서 논의하겠다.
첫째, 정치적 이유로서 이명박 정부가 정의를 유린하고 있다는 생각이 국민에게 부지불식간에 찾아들었고, 이에 따른 반사적 호기심이 샌델의 정의에 대한 관심으로 이행했을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선거 과정에서 친기업(비즈니스프렌들리) 정부를 구성하겠다고 공약을 했다. 실제로 정부의 출범 직후에는 강부자 내각으로 지칭되기에 이르렀다. 기업과 부자의 세금을 낮춰줬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펼쳤다.
노무현 정부 말기인 2007년에 우리나라의 1인당 GDP가 2만1000 달러를 넘어섰는데,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해 이명박 정부 때인 2009년에는 1만7000 달러 수준으로 떨어졌었다. 그리고 2010년에는 다시 회복세를 보여서 2만 달러 고지에 간신히 도달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빈부 차에 따른 명암이 확연히 달라졌다는 점이다.
2007년에서 2010년에 이르는 3년 사이에 국민 전체에게 돌아가는 파이의 크기는 일정할 뿐이데, 재벌기업의 부는 거의 2배 가까이 늘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다른 쪽이 줄었다는 것을 뜻한다. 중산층을 포함하는 일반 서민의 자산과 소득이 형편없이 줄게 된 것이다. 이른바 중산층의 몰락이 나타난 것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그 중 우선하는 것으로 정부의 환율정책을 꼽을 수 있다.
정부가 고환율을 유지하는 덕분에 대기업은 수출에 따른 이익을 많이 보게 됐지만, 역으로 수입 원자재 값이 비싸지면서 서민은 같은 돈으로 물가 오른 생활필수품을 구매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것 이외에도 신자유주의 시장의 여건과 FTA 체결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부자와 빈자의 명암을 더욱 짙게 드리우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또한 ‘고소영’내각이라는 별칭까지 듣고 있다. 기본적으로 정부 개편 과정에서 주요한 핵심 보직을 영남 편중의 인사로 채웠는데, 그 핵심으로 대통령 자신이 졸업한 고려대 학맥이거나 그가 출석했던 소망교회 출신을 중용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부자와 재벌의 편을 들어주는 정책과 사적 인연을 맺은 특정 학맥 및 집단 출신을 정부 요직으로 발탁하는 것이 정의로운 것인지 따져볼 수 있다.
한 마디로 그것은 정의에 반하는 것이다. 정의(justice)는 도덕의 일부로서 사회적 성격을 띤다.
일반 도덕의 경우, 개인이 그것을 지키지 못했을 때 먼저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된다. 예컨대 나의 지갑이 아주 얇지는 않은데, 길거리에서 걸인의 동냥을 외면하고 지나쳤다면 다소 착잡한 심정 상태에 놓이게 된다. 자선이라는 도덕적 덕목을 실천하지 않았을 경우 마음의 짐을 잠시 지게 될 뿐이다.
그러나 정의라는 도덕적 덕목은 다른 것과 그 성격이 다르다. 사회가 정의를 지키지 못하면 그것은 사회적 집단 누군가에게 현실적 피해를 입히게 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예컨대 열 사람이 서로 다르지만 협력적 역할을 수행하여 100이라는 크기의 생산물을 획득했는데, 그릇된 분배제도의 탓으로 인해 두 사람이 몫의 80을 차지하고, 여덟 사람이 나머지 20으로 물질적 생활을 이어가야 한다면 이것은 부당한 것임에 틀림없다.
현실에서 이와 같은 일이 가끔 벌어지고 있다. 영화 제작에 많은 사람의 노고가 투입되는데, 고소득을 올리는 자는 주연배우와 제작자이고 조감독을 필두로 한 그 나머지 대다수는 기초생활에도 못 미치는 작은 수당만 받는 것이 우리 일각의 현실이다.
정의는 직접적인 사회적 특성을 띠는 것으로 분별하는 것이 주류의 학설이다. 이에 근대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은 정의를 펼치기 위한 전제조건을 두 가지로 언급하고 있다. 하나는 사회적 산물이 구성원 모두의 요구를 충족시키기에는 부족한 상태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자신의 경우에 좋은 것을 많이 가지고 싶어 한다는 제한적 이타심을 갖고 있을 때이다. 이런 두 조건에서 사회적 자산과 혜택, 부담이 공정하게 분배되도록 하는 것을 정의로 보는 견해가 대두됐다.
정의가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해 대학의 현장으로 무대를 옮겨가서 살펴보자. 대학생 100명이 정치철학에 대한 강좌를 선택해서 공부한다고 하자. 100명의 학생이 수업에 임하는 태도와 방식, 열정의 내용에 차이가 있을 것이다. 밥 먹듯이 수업 빠지는 학생과 늘 뒷자리에 앉아서 딴 짓하면서 기회 봐서 도망가는 학생 또 졸기 일쑤인 학생들이 있는 반면, 늘 앞자리에 앉아서 발표를 자청하거나 교수의 강의에 집중하면서 호기심어린 눈으로 질문을 던지는 학생들이 있다.
중간 및 기말시험에서도 공부를 한 정도에 따라 천양지차의 답안을 내놓게 된다. 어찌 되었든 강좌의 담당교수는 수업을 끝내면서 평가에 따라 학점을 부과하게 된다. 이때 학생들에게 물어보자. 당신은 어떤 학점을 원하느냐고? 100명이면 100명 전부 최고 학점인 A를 원한다. 그래서 원하는 대로 모두에게 A를 주었다고 하고, 이것이 학기를 거듭하면서 계속되었다고 하자. 연구의 전당인 대학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까?
놀고먹는 학생들로 넘쳐날 것이다. 자신의 회사 특성에 맞는 인재를 뽑고자 하는 기업도 대학의 학점 평가를 불신하게 되고, 채용의 어려움에 직면할 것이다. 결국 학점 인플레와 그에 따른 혼란을 피하기 위해 대학 당국은 학점 가이드라인을 정하게 된다. 절대평가에서 상대평가로 전환하게 되는 것이다.
A학점 30% 이하, A학점과 B학점 합계가 70% 이하, 그리고 C, D, F학점은 30% 이상으로 정하게 됐다고 하자. 이제 상대평가로 변화된 여건에 놓인 교수의 입장에서 보면, 수강생 모두가 A학점 받기를 원하는데 부여할 최고 학점의 분량은 30%로 제한적인 상태에 직면하게 된다.
이때 비로소 학점 평가에서 흄이 제기한 정의의 문제가 대두하게 된다. 즉, 대다수가 원하는 높은 학점의 양은 제한적인데, 학생들 모두는 자신의 노력이나 실력과 무관하게 최고만을 원할 정도로 다분히 이기적이다.
이제부터 교수의 학점 부과가 정의로울 수 있고, 부정의할 수도 있다. 예컨대 교수가 자기와 고향을 같이 하는 학생과 자기가 졸업한 모교 출신의 후배 학생, 이전부터 친하게 알고 지내던 학생, 그리고 뇌물을 제공한 학생에게 최고의 A학점을 준다고 하면, 이것은 정의롭지 못한 행태이다.
교수가 자신의 수업내용에 비판적 의문을 제기하거나 이견을 나타내는 학생에게 나쁜 점수인 C나 F학점을 부과한다면 이것은 부정의한 행태이다. 그렇다면 어떤 학점 부과가 정의롭다고 할 수 있겠는가? 대다수 학생들이 판단하여, 저 학생들은 A학점을 받는 것이 당연하고, 또 저 학생은 D나 F학점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입을 모으는 합리적 지평이 있을 것이다.
이 지평에 오르는 자격 조건으로 출석과 발표, 수업기여도, 보고서, 그리고 중간 및 기말고사 답안지 등을 들 수 있다. 꼬박꼬박 출석하고, 열심히 준비한 주제를 발표하고, 필요할 때 알맞은 질문을 던져서 강의 주제의 맥을 짚어내고, 논문 형태로 보고서를 작성하여 제출하며, 공부도 열심히 해서 시험도 잘 치렀다면 그는 응분의 대가, 즉 A+학점을 받아 마땅하다고 여겨진다. 그 반대일 경우 C또는 D, F학점을 받는 것이 온당하다.
여기서 다수의 개별 사례에 나타나는 일반성을 취할 수 있다. 대학의 학점만이 아니라 인사, 사회적 자산의 분배 등에도 일관되게 적용되는 지평이 있을 것이다. 정의는 사회 구성원들이 물질적 삶을 의지하게 되는 사회제도를 구축하여 그에 따른 혜택과 부담을 받도록 할 때 누구나 규범적으로 마땅하고 옳은 것이라고 동의할 수 있는 것, 또는 보편적 합리성에 의해 구성되는 것으로 파악하자는 견해가 대두하게 된다.
일반적 정의의 시각에서 보면, 이명박 정부의 정책은 적지 않게 정의롭지 않거나 부정의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인사정책으로 국한을 할 경우, 도대체 영남 출신, 고려대 학맥, 대통령의 형님 추천 인맥, 소망교회 출신 등의 자격은 정의에 반하는 불합리한 요인이다.
경제 분야의 경우 부자에게 이롭게 하면서 사회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정책 역시 부정의한 것이다. 임기 전반기에는 잔뜩 부정의한 정책을 펼치다가 그것이 사회문제로 부상하게 되자, 후반기에 들어서서 공정사회를 외치는 모습은 보는 이를 화나게 만든다.
뒤늦게나마 자각해서 진심으로 공정한 사회를 만드는 데 노력하겠다면 이를 반기지 못할 이유는 없다. 늦었지만 환영할 일이다. 그런데 진심보다는 꼼수, 즉 부정의한 온갖 작태를 정의로 포장하려고 든다면 이것은 국민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 뿐이다.
샌델의 저서가 인기를 끈 이유 중의 하나로서 이명박 정부의 부정의한 행태에 대한 국민의 거부감이 정서적 바닥 어딘가에서 작동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둘째, 많은 사람들이 샌델의 책을 집어든 데는 교육적 요인, 좀 더 구체적으로는 교육심리적 요인이 중요하게 발동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인의 교육열은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학부모라면 누구나 자기 자식은 최고 명문학교로 보내고 싶어 한다. 가장 우선해서 서울대를 보내기를 희망할 것이다. 이런 정서에 비추어 보면 세계 최고의 대학인 미국 하버드대에 대한 선망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하버드대에서도 10년 이상 명 강의를 하는 것으로 유명한 마이클 샌델에 대해 진지한 호기심일 갖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샌델의 책이 인기를 끈 데는 세계 최고 명문대의 명강사가 전하는 내용을 접하고 싶은 교육적 동기가 발현된 것으로 파악해도 될 것이다.
셋째, 최근 한국 사회에 드리워진 사회적 여건에서 인문학적 갈증이 생겨났고, 그런 갈급증 속에서 인문학의 꽃인 철학에도 다가가려는 경향이 샌델의 책을 선호하게 된 배경으로 볼 수 있다.
한국은 1997년에 IMF 외환위기를 겪게 되면서 혹독한 사회적, 경제적 시련을 겪은 바 있다. 천신만고 끝에 이 사태를 극복한 것이 엊그제인데, 또 다시 미국 뉴욕의 월가에서 시작된 금융위기가 2008년에는 글로벌한 형태의 초대형 파고를 형성하여 지구촌을 덮쳤다.
무역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도 그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중산층 이하의 시민들의 삶은 갈수록 피폐해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왜 미국에서 벌어진 금융권의 주택담보대출에 따른 부실이 우리나라와 전 세계로 번지게 되었는가?
우선 월가 금융권은 머리 똑똑한 돈 벌레가 가득히 모인 곳으로서 어떻게 하면 연봉과 배당 수당을 높일 것인가에만 관심을 집중하는 곳이다. 이때 자신들의 결정이 다른 무엇인가를 희생시키는 것이라고 해도 이를 불사하고자 한다. 그 희생양은 가난하고 불쌍한 다수의 그 누군가(미국과 유럽, 한국의 서민 등)이더라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물론 금융기업 각자의 위험 부담이 느껴지기 때문에 전 세계 금융권으로 하여금 부실 채권을 잘게 쪼개어 나눠 갖는 범죄심리학적인 공범자의 치밀함도 곁들여졌다. 대마불사 형국을 조성하여 배짱을 부리게 된 것이다.
수면 위로 부상한 금융권 전체의 부실이 대공황으로 치닫게 되는 것을 막으려면 공적인 정부 자금이 투입될 수밖에 없다. 이때 경제적 구조조정을 단행해야 하는 까닭에 실직자가 늘어나게 되므로 서민의 삶은 휘청거리게 된다.
금융위기 대처를 위해 정부의 시장 개입이 이루어지면서 사회가 요동을 치게 될 때, 과연 우리는 돈벌이가 우리 삶의 근원적 목표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도대체 약삭빠르게 경제적으로 처신하는 것이 우리가 가질 최고의 행위 동기인가?
이런 반문을 던지다 보면 경제생활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여전히 갖게 되지만, 그렇다고 해도 우리 자신이 스스로를 오직 경제적 동물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이 지평에서 우리는 나의 자아(self)가 갖는 정체성과 사회 속 타인과의 바람직한 관계성 등에 대해 반성적 사유를 하게 된다. 인간의 삶과 의미에 대해 성찰하는 인문학으로 시선을 모으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 사회는 IMF 외환위기 사태와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인문학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샌델의 저서에도 주목을 하게 되는 사회적 여건이 조성된 것이다. 샌델의 저서에 시선을 보내게 되는 사회적 요인을 더욱 구체화해서 분별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세계 최강국인 미국에 의해 해방을 맞이한 이후 대미의존도를 높여 왔다. 세월의 흐름 속에 미국의 사회제도가 지속적으로 도입됐다.미국식의 제도와 식생활, 의식구조가 한국인에게 유입된 것이다.
특히 독일 등 중북부 유럽과 달리 미국에서 두드러진 개인주의적 자유주의(individualistic liberalism) 사조가 들어와서 번지기 시작했다. 이 사조는 개인의 자유와 선택, 독립성을 보장해준다는 강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타인과의 내적인 연계성, 정서적 친밀성을 절단하는 단점을 갖는다.
개인주의적 자유주의는 경제적으로 시장주의를 지원한다. 그런데 경제 지평에서 작동하는 시장주의의 탐욕에 모든 것을 내맡기게 되면, 그로 인한 폐해는 급격히 증폭된다. 시장의 탐욕이 학교로 확산되고, 심지어 가정으로도 침투한다.
사회제도에 의해 개인의 이기심은 더욱 노골적으로 나타난다. 마침내 공동체의 미덕(virtues of community)이 커가기는커녕 들어설 자리조차 비좁아진다. 세상이 물질로 넘쳐나지만, 사회적 삶은 갈수록 각박해져 간다. 인정이 마른 사회에서 정신적으로 행복해하는 사람은 적어질 것이다.
샌델은 바로 이런 미국 사회를 보면서, 그 도래에 책임이 있다고 여겨지는 개인주의와 자유주의, 공리주의의 정의관을 비판적으로 성토하면서 그 대안으로 조심스럽게나마 공동체의 가치, 공동선의 정의를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사회가 미국의 제도로 옷을 갈아입은 정도만큼 샌델의 주장은 우리에게도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샌델의 책을 읽으면서 이 점을 느끼게 되었다면, 샌델의 메시지를 성공적으로 독해한 것이 될 것이다.
◆샌델의 정의관으로 본 한국 사회의 실상과 평가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저서가 한국에서 선풍적 인기를 끈 데는 기본적으로 현실 속의 사례를 풍부하게 들면서 정치철학의 이야기를 비교적 쉽게, 그러면서 매우 유익하게 들려주고 있음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런데 그 속을 보다 깊이 살펴보면, 미국 모델을 구현하고 있는 한국 사회와 이명박 정부에서 국민들이 느끼게 된 바닥의 문제의식과 회한, 정서가 일정하게 반영돼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샌델은 미국 사회가 처한 현실을 정치철학적 입장에서 조목조목 비판적으로 조망하고 있다. 그는 공리주의(utilitarianism)가 사회적 및 경제적 파이를 키우는 데만 초점을 맞춘 나머지 사회적 약자가 입게 될 피해를 외면하게 된다고 비판한다.
그는 자유주의(liberalism)가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적 결단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사회 구성원 모두가 처한 사회적 맥락, 즉 시간축의 역사성과 공간축의 연대성을 간과하게 된다고 강조한다.
그는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가 시장만능주의를 내세우게 됨으로써 사회가 이기심으로 가득 차게 될 뿐 아니라 작은 정부의 역할 제한으로 인해 사회 공동선의 실현을 방치하게 된다고 비판한다. 필자는 이런 샌델의 비판이 오늘의 한국 사회에 매우 의미있게 활용될 수 있다고 본다. 한국 사회가 미국식 제도로 옷을 갈아입는 정도만큼 적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우리 자화상을 살펴보자. 사회양극화 현상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는데, 역시 미국을 닮아가고 있다. 샌델에 따르면, 미국은 상위 1%가 하위 90%보다 더 많은 부를 소유하고 있다.
기획재정부가 2012년 1월에 발간한 ‘2011년 국가경쟁력보고서’에 따르면, 소득분배 불균형을 나타내는 지니계수가 한국의 경우 2008년에 0.315로서 OECD 조사대상 국가 34개국 가운데 중하위권인 20위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 보다 한 단계 나은 나라가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그리스로서 19위이고, 우리보다 열악한 곳은 미국으로서 31위이다.
미국의 제도 가운데 본받아야 할 것이 적지 않지만, 결코 닮지 않아야 할 것도 있다. 미국은 흑인 노예제를 채택하다가 이를 철폐한 탓에 여전히 불평등이 심할 수밖에 없는 나라다. 미국의 사회 불평등 수준에 점차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것은 국가적 불행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중산층이 점차 무너지고 있는데, 하위 빈곤층이 더욱 늘어나고 있다. 가계의 월 소득이 160만원 미만인 빈곤층의 비율이 2000년에 9.2%였는데, 2010년에는 12.5%로 증가했다.
한국 사회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최대 요인은 청년실업이 만성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청년들이 학교(대학과 고등학교)를 졸업해도 양질의 일자리는 매우 적다. 극히 일부만이 대기업으로 진출할 수 있을 뿐이다. 나머지는 그다지 내키지 않는 중소기업 일자리가 대다수고, 그나마도 비정규직으로 고용되어 대기업의 하청을 받는 노동자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그런데 FTA 타결로 수출에 유리한 대기업은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싶은데, 침체된 사회 분위기로 인해 속으로 속삭일 뿐이다. 재벌과 대기업의 넘쳐나는 돈은 잠겨 있거나 임원들의 고액 연봉으로 지출되고 있다. 정치권과 유력 언론, 재벌, 엘리트 관료의 결탁 속에 경제구조는 왜곡되었고, 그에 따른 폐해가 곳곳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이 알게 모르게 수용한 개인주의적 자유주의는 인간을 무연고적 자아로 만든다. 마침내 시장의 탐욕과 결부되어 개인은 경쟁으로 내몰리는 고립적 자아가 된다. 학교든 기업이든 사회의 어떤 곳에서도 고립적 자아가 경쟁에서 승리를 하면 잠시 기쁨을 만끽한다. 그러나 늘 승리만 쟁취할 수 없다. 추락할 때도 있다. 그리고 패자는 고독하고 외롭다. 따뜻하게 위로하고 슬픔을 나눌 수 있는 아름다운 인연을 끊어버리는 절연의 길을 치달았기 때문이다.
결국 절망에서 벗어날 수 없거나 심리적으로 유약한 사람들은 자살을 선택하게 된다. 보라, 한국인의 자살률이 어느 정도인지. 2010년도 기준으로 한국의 자살률은 세계 최고로서 OECD 평균인 11.3명의 네 배에 가까운 1일 평균 43명이다. 너무도 놀랍다.
특히 2000년과 비교하는 10년 사이에 무려 130.2%가 늘었다. 오죽하면, 영국 BBC방송이 ‘자살공화국 한국’을 심층적으로 보도하면서, ‘한국은 부유해졌지만, 사람들은 한국전쟁 직후의 어려웠던 시절보다도 덜 행복해 보인다’고 논평을 했겠는가!
오늘의 한국 사회가 처한 현실은 땜질식 처방으로 해결될 성질의 것이 못 된다. 간결하게 표현하면 약삭빠른 이기심이 경제 영역뿐만 아니라 관료사회와 언론 심지어 학교와 가정에도 침투하고 있는데, 역대 정부와 기존 정치권이 이를 방조하거나 외면한 총체적 결과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뿌리까지 썩었다면, 근원으로 돌아가서 사회 재구축을 해야 한다. 때문에 ‘정직이 최선의 정책’이라는 말을 곱씹어보고 싶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처한 사회와 가족의 역사성과 문화적 토양 속에서 성장과 성숙을 맞이하게 된다.
개인주의적 자유주의가 얘기하는 무연고적 자아는 환경일 뿐이고, 실제로는 우리 각자는 연계적 자아(relational self)이다. 자아는 어디까지나 자아이기 때문에 고유성의 자유를 갖지만, 그것이 가족이나 이웃, 동료, 타인과 뿌리에서 연결되어 있다.
이때 가족과 이웃에 대해 우리는 사랑, 정직, 배려와 같은 미덕을 갖춘 자세로 다가가야 한다. 이제 이기심과 탐욕이 사회 곳곳에서 독버섯처럼 자라도록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름답고 칭송받을 덕목이 함양될 수 있도록 사회제도가 뒷받침을 하도록 해야 하며, 이 일이 바르게 진행되도록 정치가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서야 한다.
이렇게 되면, 사회 양극화는 해소되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상생하게 되어 좋은 일자리는 더욱 늘어나며, 차별받는 비정규직은 점차 사라지게 된다. 청년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고 서로 연대하게 될 것이며, 자살을 할 사회적 이유가 사라지는 아름다운 사회를 맞이할 수 있다. 연계적 자아의 자유를 누리면서도 서로 협력하여 공동선을 펼치는 새로운 한국 사회를 재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 한면희 대표가 말하는 사랑·인애·자비와 공동성의 제3정치란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대혁명의 횃불은 자유와 평등, 박애로 집약되는 구호 속에 등장했다. 그런데 19세기 이후 정치적으로는 자유의 가치를 우파가 내세우고, 평등의 가치는 좌파가 중시하는 형세로 전개됐다.
우파는 자유주의 정치사상을 경제적 자본주의와 연동시킴으로써 사회 구성원 사이의 유대감을 절단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좌파는 무계급 사회를 추구하면서 공산당의 독재를 허용함으로써 개인의 자유와 더불어 박애라는 인간의 고귀한 가치도 함께 불구로 만들어버렸다.
박애(philanthropy)는 성서의 으뜸 원리인 사랑이 사회적으로 구현되는 방식이고, 그것이 동양의 유학에서는 인(仁)으로 표출되었으며, 불교에서는 자비(慈悲)로 드러났다. 세계의 보편종교가 가장 중시하는 덕목을 근현대사의 정치는 외면하고 있는 셈이다.
현존 사회주의가 몰락한 오늘날 자유주의 정치제도는 사회적 덕목을 가정과 학교에 맡기고 있을 뿐이다. 사회적 연대주의가 폭 넓게 드리워져 있는 중북부 유럽의 권역(독일과 북유럽 국가 등)과 달리 미국은 개인주의적 자유주의가 득세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자본주의의 야수성이 사회에 파급되면 될수록 사회 공동체에게 좋은 공동선(common good)은 실종되기 일쑤이다.
심지어 시장의 논리와 개인주의 정서가 학교는 물론 가정에도 침투돼 있다. 그 결과 공동체 구성원 사이에 인애(仁愛)의 유대감이 실종되고 있음은 물론 서로에 대한 배려와 존중, 양보의 미덕은 갈수록 옅어지면서 그 자리에 이기심과 시기, 질투, 무한 경쟁이 만연되고 있다.
사회가 물질적으로 풍요를 형해 치닫고 있지만 이기심의 확산으로 인한 경쟁과 부패가 사회를 병들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부터라도 정치는 인애의 자세로 서로를 대함으로써 사회의 공동선을 구현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뒷받침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제3정치의 물결을 조성해야 한다.
제3정치의 시각으로 조망하면, 사회는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정도(正道)로 나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정치적 중용이 필요하다. 중용(中庸)은 양 극단의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알맞은 상태와 과정을 뜻한다.
정치적 양 극단으로는 우파가 선호하는 개인주의적 자유주의가 설정되어 있고, 그 반대편에서는 좌파 역시 미끄럼을 타기 쉬운 집단적 전체주의가 놓여 있다. 개인주의적 자유주의는 고립적 자아를 붙잡게 되지만 역사적 및 유기적 연계성을 잃게 된다. 무연고적 자아의 지평만 남게 된다. 그 대립 항인 집단적 전체주의는 전체를 위한 연고성을 갖게 되지만, 자아의 고유성이 상실되기 십상이다. 정치가 바로 들어서게 될 길은 양 극단의 중용에 해당하는 자유(주의)적 공동체주의(liberalistic communitarianism) 지평이다.
중용의 자유적 공동체주의 정치는 3차원적이어서 2차원적인 중도의 정치와 다른 것으로 분별해야 한다.
서양의 제1정치가 자유주의의 가치를 기치로 내세우는 정치이고, 제2정치가 평등적 사회주의의 가치를 기치로 내거는 정치라면, 그동안 중도의 정치는 좌와 우 사이의 스펙트럼에 위치한 정치를 뜻했다.
나는 이런 중도(중도 우 또는 중도 좌를 포함)의 정치를 2차원 정치로 규정하겠다. 내가 주창하는 새로운 정치는 좌와 우, 평등과 자유의 두 가치로써 규정되는 두 범주의 정치, 2차원의 정치가 아니다.
두 범주적 가치와 다르면서 그것들을 본원적으로 규정하는 제3의 가치 범주, 즉 공동선을 구현하는 데 핵심이 되는 사랑(인애, 자비)의 미덕을 통해 인도주의적 배려와 보살핌이 이루어지는 또 하나의 가치 범주를 설정하고자 한다.
따라서 사랑의 가치가 머리의 역할로서 중심을 잡고 그 양 날개로서 좌와 우에 각각 배치된 평등과 자유의 가치를 조화롭게 조율하는 새로운 중용의 자유적 공동체주의 정치를 펼쳐야 한다고 본다.
이런 의미에서 자유적 공동체주의는 무연고적, 고립적 자아의 선을 넘어서서 수직적 시간 축으로 역사성을 간직하는 맥락적 자아이면서 또한 수평적 공간 축으로는 사회 구성원과 함께 유대를 하는 연계적 자아의 지평에 들어서게 된다.
이때 자유적 공동체주의는 자아의 고유성과 집단의 자율성을 중시하기 때문에 전체를 위해 개인과 약자 집단을 희생시키는 전체주의의 오류를 겪지 않게 된다.
자유적 공동체주의는 사회제도를 통해 자유로운 개인의 연대적 덕목을 키우고 또 공동선을 실현하는 데 적극적으로 뒷받침을 하는 정치를 추구한다. 경제와 교육, 복지 등 제반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정책을 구사할 때 자유주의나 집단주의와 차이가 나는 정책을 추진한다.
무수히 많은 사회적 역할의 수행자가 배치되도록 할 때 역할 수행에 따른 개인의 능력을 중시하지만 그것과 더불어 역할의 관계성에 따른 미덕 지닌 자를 우선시함으로써 사회적 해악이 커가는 것을 제약하면서 미덕이 날로 커갈 수 있도록 제도를 구축하고자 한다.
예컨대 외교부장관의 비서를 쓰는 방식에서 차이를 선명하게 드러낸 사건(반모 전 장관 대 유모 전 장관)에서 보듯이 외교부 내규를 제도적으로 어떻게 조성하느냐 등에서 그 해법을 찾을 수 있다.
미국 우주탐사선 챌린저호 사건이나 샌프란시스코 고속철도사업 사건 등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과학기술의 사회적 영향이 날로 커가는 현대사회에서 엔지니어의 사회윤리적 책임에 따른 제도적 장치 마련 여부도 그런 사례의 하나가 될 것이다.
공동선의 정치가 구축되었더라면, 2011년에 초에 드러난 가습기 첨가제 폐질환 사건도 사전에 예방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부동산 정책을 펼칠 때, 자애의 시각으로 집 없는 서민에게 안정적 주거여건이 마련되도록 하는 데 가장 우선적 비중을 두는 정책을 펼칠 것이다.
투기로 인한 불로소득이 있는 곳에 과징금을 물려서 다른 요긴한 곳에 세수로 쓰는 정책은 주거 안정화가 이루어지는 정도를 보면서 단계적으로 시행하되, 어디까지나 공동선이 증진되는 방향으로 인도할 것이다.
우리 사회가 성숙한 지평으로 발돋움을 할 수 있도록 사랑의 정치, 공동선의 정치를 펼침으로써 자유를 구가하면서 인정이 흘러넘치는 사회를 조성하는 데 정치가 중요한 역할을 하도록 할 것이다.
결국 나는 우리사회의 미완성의 정치 가치인 자유와 평등을 조율할수 있으며 제1정치 가치와 제2정치 가치가 충족하지 못하는 우리사회 정의 실현을 위해 제3정치 가치인 사랑, 인애, 자비의 가치를 사회공용성의 가치와 함께 우리정치에 도입할 때 비로써 우리사회 정치가 바로설 수 있다고 판단한다.
강은태 NSP통신 기자, keepwatch@nspna.com
<저작권자ⓒ 국내유일의 경제중심 종합뉴스통신사 NSP통신.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