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NSP통신) 염공료 프리랜서기자 = 강화도는 1679년(숙종5년)에 왜군의 침입을 막고 감시하기 위해 54개의 돈대를 축조했다. 굴암돈대는 그때 축조된 54개의 돈대 중 하나로 석모도와 장봉도 등을 두루 살펴 볼 수 있는 곳이다. 뒤쪽으로는 야산이 있고 삼면은 바다를 훤히 내려다 볼 수 있는 장소이다.

지금은 굴암돈대라는 지명을 찾았지만 어렸을 때 이곳은 ‘돈대깟’이라는 지명으로 불렸다. 돈대 주위 ‘가’라는 이름이 강화 특유의 거센 발음으로 ‘깟’이 됐던 것이다.

굴암돈대는 내가 어렸을 때 놀이터처럼 올라 다녔던 곳이다. 50년 전에는 문화재가 무엇인지도 몰랐으니 그저 옛날에 사용했던 돈대였다는 것만 알았다. 돈대 옆에 집을 짓고 살았던 부모님은 돈대 안과 밖의 야산을 개간해 밭을 일구고 사셨다. 그렇게 자연히 돈대는 어린시절 나만의 놀이터가 됐다.

굴암돈대는 타원형처럼 생겼지만 반원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대포를 올려놓는 포좌는 4문으로 돼 있어 화도면, 장봉도, 삼산면, 건평리를 살펴볼 수 있다. 성곽 위에 올라서면 두루 보이는 바다의 풍경이 시원하게 펼쳐지고 바로 밑의 바다까지 훤히 보이는 곳이라 천해의 요새라 할 만 하다.

돈대가 관리되지 않을 때라 돈대 안은 당연히 놀고 있는 땅이었으니 부모님은 이곳에 곡식을 심었다. 돈대 안은 바람도 적게 들어오고 따뜻해 농작물은 잘 됐다. 부모님이 돈대 안에서 농작물을 가꿀 때면 성곽 위에 올라가 놀거나 포문에 들어가 소꿉놀이를 하기도 했다. 부모님이 멀리 출타 하셨을 때는 성곽 위에 올라 어디쯤 오시나 목을 빼고 기다리기도 했다.

지금은 허리를 굽히고 들어가야 하는 포좌는 어린아이에게는 아늑한 요새와 같은 곳이었다. 커다란 돌을 올려 지붕을 만든 포문은 4개중 3개가 무너져 있어 안타까웠다. 성곽을 쌓은 돌덩이를 하나하나 정으로 쪼갠 흔적이 아직도 선명히 남아있다. 모양은 각기 다르지만 쌓아 올린 성곽은 작은 틈새 하나 없이 정교하게 아귀가 맞는다. 몇 백 년이 흘러도 무너지지 않게 축조 된 것을 보니 새삼 놀랍기도하다.

성곽에 올라 오른편으로 본 건평리의 모습이다. 건평리를 지나 산모퉁이를 하나 더 돌면 작은 섬으로 들어가는 배를 탈 수 있는 선착장과 수산물 시장이 있는 외포리다. 해안도로가 생기기 전 바닷물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은 둑을 걸어 다녔다. 지금은 해안도로라고 부르지만 오래 전에는 ‘성뚤’로 불렸다. 쌓아 올린 성과 둑의 합성어 ‘성둑’이지만 이곳에서는 ‘성뚤’로 발음했다. 한사람이 걸어갈 정도의 좁은 둑은 파도가 심하게 치면 무너지기도 했다. 바닷물이 논으로 들어와 다시 마을 사람들이 쌓아 올리기도 했던 둑은 이차선의 해안도로가 됐다.

성곽에 올라 왼쪽을 보면 화도면이 보인다. 멀리 마니산이 보이고 마니산의 능선은 해안가로 내려와 후포항과 장곶돈대가 있는 곳까지 이어진다. 서해안의 갯벌은 생명의 보고라 이르는데 지금은 바다를 막아 길을 내고 양식장을 만들어 갯벌이 반은 사라진 모습이다.

굴암돈대는 1970년대 북한공작원의 침투사건으로 해군이 주둔하면서 출입금지 지역이 됐다. 바닷가에 굴을 따러 나오는 마을 주민들도 군의 관리하에 출입이 허용됐다. 지금은 그때처럼 삼엄한 경계가 아니지만 돈대 옆에 군부대가 자리해 촬영은 금지돼 있다. 관리되지 않았던 강화의 돈대는 1976년부터 점차 복원사업화되면서 굴암돈대도 지금은 일반인의 발걸음을 허용하고 있다.

굴암돈대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산 98번지에 자리하고 있다.

NSP통신/NSP TV 염공료 프리랜서기자, ygr632@nspna.com
저작권자ⓒ 한국의 경제뉴스통신사 NSP통신·NSP TV.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