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NSP통신) 강은태 기자 = 안동의 주산인 학가산의 본찰은 광흥사였다. 조선시대 473칸에 달했던 영남제일찰(嶺南第一刹)은 그러나 이후 몆 차례의 소실로 인해 거의 잊혀진 사찰이 되고 말았다.
신라시대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된 사찰은 1827년 대화재로 모든 전각이 불타는 비운을 맞았다. 그러나 광흥사가 간직하고 있는 역사는 오롯하게 남아 오늘에 이른다.
조선 세조 당시 광흥사의 주지였던 학조(學祖)대사는 신미(信眉)·학열(學悅)과 함께 당대를 풍미하면서 간경도감이 설치됐던 광흥사에서 월인석보를 비롯한 수많은 책들을 출판했다.
학조대사는 지장경언해(地藏經諺解), 금강경삼가해언해(金剛經三家解諺解), 천수경(千手經)을 교정 인출하고 증도가남명계송(證道歌南明繼頌)을 번역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했던 승려였다.
광흥사는 중창한 대웅전이 1946년 화재로 다시 소실되면서 응진전이 금당의 역할을 하게 되는 소박한 현재의 모습으로 남게 됐다.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던 9월 초순에 광흥사를 중흥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주지 범종(梵鐘)을 찾았다. 후덕하고 넉넉한 이미지의 주지 범종은 현재 훈민정신세계화연구회의 총재직을 맡고 있다.
광흥사와 주지 인연을 맺은 범종 총재는 10여 년 전부터 훈민정음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면서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 대한 새롭고 흥미로운 가설을 제기한 바 있다.
◆광흥사와 훈민정음해례본의 상관관계
Q, 얼마 전 훈민정음해례본 문제가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다. 그리고 아직도 훈민정음해례본은 세상에 나오지 않고 있다. 총재께서는 훈민정음 해례본이 이곳 광흥사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A, 제가 광흥사 주지로 부임한 것이 2010년도인데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었다. 그런데 부임한 지 한 2~3개월 정도 되었을까 수사관들이 와서 도굴사건을 조사한 적이 있다.
지장전을 살펴보길래 지장전은 1985년도에 중창한 것이고 응진전이 그 전에 도굴당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이야기했더니 응진전을 조사하고 갔다. 응진전은 그동안 세 차례에 걸쳐 도굴 당했는데 처음 두 번은 서모씨가 도굴한 것이고 마지막은 1999년~2000년 무렵에 도굴 강도가 들어와 아예 당시 주지승을 묶어놓고 경보기도 훼손하고 불상도 파괴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는 얘기를 들은 바가 있다.
훈민정음해례본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배 모씨가 2008년도에 자신의 집에서 훈민정음해례본이 나왔다고 공개하면서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다. 하지만 이를 본 골동품상을 하는 조모씨가 본인 것을 도둑 맞았다고 하면서 법적 투쟁을 하게 된다. 이를 본 서모씨가 당시 감옥에 있었는데 본인이 광흥사 석가모니 복장에서 훔쳐 조모씨에게 팔았다고 증언 하면서 광흥사와 연관을 맺게 된다.
그 소식이 알려지면서 부터 여기저기로부터 저에게 문의가 왔는데 당시에 저는 이에 대해 아는게 없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공부를 시작했다. 아마 평생에 그때처럼 열심히 공부한 적이 없었을 거다. 그래서 공부하고 연구하다 보니 광흥사가 예사로운 사찰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1827년도에 쓴 광흥사 중수기가 기록된 어필각이 있는데 살펴보면 기록에 광흥사는 신라의 고찰이었고 국가의 원당 사찰이었다. 특히 명나라의 개국공신의 집안으로 명나라 3대 황제 영락제의 정비였던 인효문황후가 권선책 구(오래된) 책을 광흥사에 보냈다는 기록도 나온다. 그리고 세종대왕이 직접 쓴 법화경 친서도 여기에 있다. 또 고려 후기의 영종 대왕 병풍 16폭짜리가 있었다고도 기록돼 있다.
1952년 11월 12일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훈민정음해례본 목판본 15장과 월인석보 400여 장이 광흥사에 있었는데 1946년도 화재로 소실됐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래서 훈민정음 해례본은 광흥사에 있었을 수밖에 없다는 확증을 갖게 됐고 이후 법원 1심 판결에서 지금도 권리가 없는 사람들이 주인이라고 주장하는 훈민정음해례본이 광흥사에서 절도 당한 것이라는 판결이 나오기도 했다.
이후 제가 적극적으로 법원에 다니면서 사건자료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훈민정음해례본을 가지고 있는 배모씨는 훈민정음해례본이 본인 집에서 나온 자기 것이라는 주장이고 골동품상 조모씨는 자신이 운영하는 골동품상에서 배모씨가 훔쳐간 것이라고 주장하며 서모씨는 자신이 광흥사에서 훔쳤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저는 과거의 기록과 서모씨의 주장이 일치하기 때문에 문제의 훈민정음해례본은 광흥사본이 맞다고 생각한다.
특히 세조때 전국에 11군데에 간경도감(刊經都監)이 설치되는데 안동의 간경도감이 있던 곳이 이곳 광흥사라고 사학자들은 보고 있다. 당시 간경도감에서는 불서나 유학의 다양한 책을 언해(諺解)해서 출간했는데 이곳 옛 어르신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이곳을 판골이라고 했다. 많은 경판들이 나와서 그런 것인데 학서루(鶴棲樓)라는 곳이 있었는데 경판들이 학서루 누각 밑에 쌓여있었다고 증언한다.
2013년 문화재청에 의뢰한 명부전에 봉안된 시왕상과 인왕상 복장 조사에서 서지학(書誌學)적으로 중요한 전적들이 나왔다. 특히 ‘월인석보’ 총 4권이 나왔는데 월인석보는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합해 1459년 세조 때 편찬한 불교 언해서로 광흥사에서 7권, 8권, 21권이 두 권으로 총 네 권 487장이 발견됐다. 이 가운데 21권은 현재까지 동일한 내용이 없어 초간본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복장유물을 볼 때 광흥사가 훈민정음해례본의 출처지 임을 심증하고 있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제작한 동기는
Q, 총재께서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들게 된 동기와 한글 보급이라는 기존의 내용과는 다른 한글을 통해 불교를 포교하려고 했다는 주장이신데 이유는
A, 세종대왕의 왕비인 소헌(昭憲)왕후는 독실한 불자로서 생전에 세종에게 “백성들에게 석가모니의 말씀을 전했으면 좋겠다”라는 소원을 자주 말했으며 소헌왕후가 서거하자 세종은 소헌왕후의 원에 따라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지어 펴냈다.
이어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도 펴낸다. 세종은 즉위하자 경복궁 내불당(內佛堂)에 신미 대사를 주지로 임명한다. 이때 신미 대사의 친동생인 김수온(金守溫)이 함께 경복궁으로 들어온다. 김수온은 나중에 우의정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우리는 흔히 조선이 배불 정책을 쓰고 불교를 억제해 불교가 다 사라진 줄 알지만 그렇지 않다. 세종대왕도 불교를 신봉했다.
신라로부터 1000년 이상 이어온 종교가 하루아침에 사라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조선 초기에는 아직도 불교가 대세였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신미 대사는 왕사 역할을 했다.
인도를 보더라도 수천 년 된 카스트제도가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유지되고 있다. 불교가 국교였던 고려가 망했다 하더라도 정치 체제가 아닌 불교라는 문화는 절대로 쉽게 없어질 수 없는 것이다.
신미 대사의 스승은 조선 전기 ‘원각경소’·‘금강경오가해설의’·‘함허화상어록’ 등을 저술한 법명은 기화(己和)로 호는 득통(得通)이고 당호는 함허(涵虛)인데 함허 대사는 유명한 무학대사의 제자다.
그리고 무학대사의 스승은 고려말 나옹(懶翁) 대사다. 나옹 대사의 스승이 지공(指空) 화상이고 지공 화상은 인도인이다. 지공 화상은 생전에 고려의 백성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자가 있어야 불법을 배울 수 있다고 말했다. 훈민정음에 관여한 승려들의 법통이 인도 승려였던 지공 화상과 연결돼 있는 점도 흥미로운 일이다.
그래서 훈민정음의 창제 목적은 불교의 전법을 위해서라고 본다.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창제하시고 제일 먼저 펴낸 책이 석보상절(釋譜詳節)이다. 석보상절은 석가모니의 일대기와 주요 가르침을 담은 책이다.
다음으로 펴낸 책이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이다. 월인천강지곡은 세종이 석보상절을 보고 훈민정음으로 지은 찬불가(讚佛歌)다. 엄격한 숭유배불 정책으로 내불전을 지을 때도 숱한 반대 상소를 극렬하게 올렸던 시기에 어떻게 불교 관련 책을 펴낼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보면 당시 유학에도 많은 경서가 있었고 펴낼 수 있는 책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불교책이 출간 됐던 것이다. 여기에 훈민정음 창제의 목적이 있다고 봐야 한다.
Q, 그렇다면 항간의 가설처럼 총재께서도 훈민정음이 인도의 산스크리트어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데 동의 하시는지
A, 부정할 수는 없다. 아직은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세종대왕을 도와 훈민정음을 창제하는데 일조한 것으로 보이는 신미 대사가 당시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파스파문자 등 6개 국어에 능통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면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생각이다.
◆훈민정음 세계화를 위한 훈민정신이란
Q, 총재께서는 훈민정신을 주장하시는데 훈민정신을 설명한다면
A, 훈민정음의 훈(訓)자가 말씀 언(言) 변에 내 천(川)자다. 그래서 훈민은 백성들에게 정신을 가르쳐야 한다는 뜻을 가지고있다. 정음의 정(正)은 불교의 팔정도(八正道)다. 팔정도는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으로 이는 소리만이 아닌 소리에 내포 돼 있는 바른 의미를 말한다.
이는 목민(牧民)이라는 군주 시대와 같은 일방적이 사상이 아니라 아니라 훈민(訓民)이라는 공유의 가치가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훈민은 정신이다고 말할 수 있다.
훈민정음의 내용을 보면 한글을 깨닫는 데는 영특한 사람은 하루 저녁나절이면 가능하고 우둔한 사람이라도 10일이면 깨달을 수 있다고 서문에 기록돼 있다.
거기는 어떤 내용을 알 수가 있느냐 하면 우리가 로마자를 많이 쓰고 영어 내지는 스페인어 프랑스어 등 많은 로마 자를 쓰고 있지만 사실은 발음기호와 스펠링이 다르기 때문에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나 우리 한글은 자음 17자 모음 11자 등 28자를 가지고 1만1172가지를 표기할 수가 있다. 예를 들어보면 우리가 개 울음소리를 표기하자고 하면 영어로는 개 울음소리가 ‘바우바우’내지는 ‘형형’ 정도 수준이지만 한글은 개의 감성까지도 표현할 수 있다. ‘멍멍’, ‘월 월’, ‘깽깽’, ‘끙끙’ 등 이처럼 개의 모든 감성을 다 한글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게 우리의 문자다. 그 위대성은 바로 우리의 한글이 바로 감성의 글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세계의 말들은 현재까지도 저마다 소통과 공유에 문제가 많은데 우리는 한글 제작 당시부터 감성에 이르기 까지 훈민정음을 통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열었다는 것이 훈민정음의 중요한 가치인것이고 훈민정음을 창제한 정신이다.
◆훈민 정신 세계화 연구회
Q, 이번에 훈민정신세계화연구회에서 훈민정신세계화 선포식을 준비하고 계신다고 들었다. 소개한다면
A, 제가 인도 뉴델리에 있는 네루 대학에서 강의를 한 적이 있었다. 또 프랑스, 튀르키에 등에서도 강의한 적이 있다. 반응이 좋아 2023년 중국 베이징 대학에서의 강의가 마련 돼 있던 중 한국에서 먼저 강의를 하자는 요청이 쇄도해 강의를 하게 됐다. 그래서 문화원에서 훈민정음 강의를 하고 또 세종로 포럼에서 강의를 했더니 많은 분들이 모이게 되고 여기에서 이토록 아름다운 훈민 정신을 기리는 사업을 펼쳤으면 하는 바람들로 ‘훈민정신세계화연구회’라는 단체를 만들게 됐다.
훈민정신세계화연구회에는 훈민정음을 연구하시는 교수님들을 비롯해 각계각층의 훌륭하신 분들 약 30여 분이 참여하고 계시다. 특히 강북성심병원 이사장이신 최낙원 원장님께서 물심양면으로 큰 역할을 하고 계시다.
바로 그 훈민정신세계화연구회의 첫 번째 사업으로 오는 10월 8일 오후 4시 조계사 전통문화예술공연장에서 훈민 정신 세계화 선포식과 함께 초하 윤경희 화백 훈민정음 초대 전시회를 연다. 그리고 전시회는 2주간 계속된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많은 부분이 아직도 베일에 가려져 있다. 문화 역시 다르지 않다. 우리가 한글이라고 부르고 있는 우리 문자의 정확한 명칭은 훈민정음이다. 문자의 기획과 구성, 우수함을 직시해 볼 때 한글이라는 다분히 민족 추상적 용어보다는 세종이 추구했던 훈민정신을 이어받아 훈민정음으로 부르는 것 또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대목이다.
훈민정음의 창제에 관한 당시의 상황과 기록들이 주장을 넘어서 더욱 세심히 연구하고 바로잡아야 할 이유는 너무도 많다. 불교를 포교하기 위해 만든 훈민정음이라면 현재에는 오히려 한글이 기독교의 성경에 쓰여있고 불교는 한문으로 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아이러니하다.
훈민정음해례본을 간직하고 있던 안동 학가산의 광흥사는 다시 중흥의 날개를 펴고 있다. 입구에 400년이 넘는 은행나무에 다닥 하게 달려 있는 은행들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광흥사의 숱한 옛이야기를 품고 있다. 기회 있는 대로 훈민정신세계화연구회의 활동들을 세상에 알려볼 생각이다.
NSP통신 강은태 기자(keepwatch@nsp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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