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NSP통신 안정은 기자) = [편집자 주] 월간문학(月刊文學)이 全日신문 동경특파원을 지낸 시인이자 수필가 월포(月浦) 박정희 선생의 인생 스토리를 담은 에세이 ‘그리운 시절 마이 러브 마이 라이프’를 발간했다.
박 선생은 이 책 속에 한국과 일본 두 나라에 얽힌 그의 가족사를 통해 두 나라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속에 지내왔다는 것을 작게나마 알리려는 노력을 담았다.
당사는 비록 작은 개인사, 가족사에 불과할지라도 결국 작은 가족사들이 모여 한 나라의 흐름이 결정되지는 않을까 하는 저자의 마음을 담아 이를 연재한다.
[여우 이야기 (후편)]
여우, 여우였다.
나는 천천히 숨을 몰아쉬고 주먹으로 두 눈을 비볐다. 그리고 다시 눈 앞을 봤다. 하지만 뾰족한 귀를 바짝 세우고 몽둥이 같은 꼬리를 보일 듯 말 듯 흔들어대는 고 놈은 두 말 할 나위가 없는 여우였다.
“할아버지…….”
입에서 할아버지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때까지 무거운 줄도 몰랐던 지게 짐이 갑자기 내 몸을 땅 속에 박아버리기라도 할 듯 무겁게 내리 눌러 왔다.
“할아버지…….”
몇 번이나 할아버지를 불렀는지 모른다. 그때의 애 타는 마음이란 하늘에 동아줄을 내려줄 것을 빌던 옛이야기 속 남매에 뒤지지 않았다. 그러나 내 목소리는 왱왱거리는 모기소리에도 묻힐 만큼 작았다. 괜히 고함이라도 질렀다가는 여우가 갑자기 달려들까 겁이 났던 것이다.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러도 모자랄 판에 모기 같은 소리를 산 아래 밭에서 일하시는 할아버지가 들으실 리 만무했다.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질 않았다. 두 발이 아예 바닥에 딱 붙어버린 듯했다. 등을 타고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
나는 여우가 어서 마음을 바꿔 먹고 가던 길이나 계속 가 주기를 간절히 빌기 시작했다. 그러나 녀석은 벌벌 떠는 내 모습을 구경하는 것이 재미났는지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대로 더 시간을 지체하다가는 곧 날이 저물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근처 공동묘지에서 파란 도깨비불이 피어오르리라는 생각에 정신이 아득해져 왔다.
뒷산에 사는 여우와 너구리는 무덤을 파내고 그 안에 가만히 숨어 있다가 사람이 지나가면 파낸 흙을 던진다던 마을 어른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장날, 잔뜩 술에 취한 채 무덤가에 뻗어 자던 한 어른은 캑캑거리며 우는 소리에 놀라 깨어나 보니 무덤 안에 들어앉은 여우와 너구리가 파 낸 흙을 던지더라는 것이었다. 그 어른은 놀란 나머지 정신을 잃었고 여우가 다가와 개울물에 적신 꼬리로 뺨을 쳐대는 통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고 했다. 그러고는 젖 먹던 힘까지 내 달음박질해 겨우 살았다는 이야기도 익히 들어온 터였다. 그렇게 여우와 너구리가 파헤친 무덤에서는 사람 뼈가 드러나 달빛에 비쳐 파란 도깨비불이 떠오르고 혼불은 산 속을 춤추듯 돌아다닌다고 했다. 지금 나를 쳐다보고 있는 저 놈도 막 무덤을 파다 나온 것이란 생각에 내 가슴은 새가슴마냥 졸아들었다.
“훠이, 훠이, 저리 가. 저리 가라니까!”
나는 여우를 향해 손을 저으며 애원하다시피 말했다. 녀석은 고개를 갸웃했고 나는 이때다 싶어 비탈 아래를 향해 한 발짝을 내딛었다.
여우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살았다 싶은 마음에 나는 얼른 몇 걸음을 더 내딛었다. 그러나 마침내 여우에게서 벗어나는구나 싶은 찰나, 녀석은 어림없다는 듯 내가 벌려놓은 거리를 단숨에 좁혀놓았다.
“하, 할아버지!”
무덤을 파던 불여우가 쫓아온다는 생각에 정신이 달아난 나는 허둥지둥 비탈을 달려 내려오기 시작했다. 녀석의 꽁무니에서 숨겨뒀던 나머지 꼬리 여덟 개가 쫙 뻗어 나와 내 간을 내어 먹으러 날듯이 쫓아올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혼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내 발이 땅에 닿는 것인지 그저 훌훌 날아가는 것인지도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흘깃 뒤를 돌아보니 여우는 종종걸음 치며 여전히 내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겁에 질린 나머지 눈물이 찔끔 새어 나왔고 시야가 흐려졌다.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한 나는 흙바닥을 붕 뜨듯이 떠나 비탈 아래로 내동댕이쳐지듯 떨어졌다. 그 뒤로 생각나는 것이라고는 지게와 한 몸이 돼 산을 데굴데굴 굴러 내려왔다는 것뿐이다.
간신히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마을길을 비틀비틀 걷고 있었다. 할아버지에게 칭찬 받을 생각에 가득 져 내려오던 억새풀은 난리통에 다 흩어지고 남아 있지 않았다. 어찌나 기세 좋게 비탈을 굴렀는지 지게는 여기저기 찌부러지고 팔꿈치와 손바닥은 온통 긁혀 피가 맺혀 있었다. 하지만 그때에 나는 그런 것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무덤을 파헤치는 불여우로부터 간신히 도망친 직후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혼이 빠진 상황에서도 나는 저 앞에서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 이의 뒷모습만은 단박에 알아보았다. 그때의 사무치게 반가운 마음이란 이루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다리에 힘이 빠져 비척비척 걷던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할아버지를 부르며 달려갔다. 그 부르는 소리에 할아버지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셨다. 뒷짐 진 손에는 밭에서 갓 뽑은 싱싱한 오이 한 줌이 들려 있었다.
“정희야? 정희 아니냐?”
내 이름을 부르는 그 다정다감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한 순간 긴장이 풀리며 “으앙”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때까지 나는 너무 놀라 울지조차 못했던 것이다. 봇물처럼 터진 울음은 그칠 줄을 몰랐고 나는 사나이 자존심도 모두 내버린 채 어린아이처럼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무슨 일이냐, 정희야? 어디서 이렇게 다쳤어? 싸웠느냐?”
다 부서진 지게며 내 몸 여기저기에 난 상처를 보신 할아버지는 놀라 물으셨다. 나는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싶었지만 가슴이 들썩거려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다만 고개를 저었다.
“그럼, 덩치 큰 녀석들이 괴롭히던?”
조금 진정이 된 나는 겨우 말을 꺼냈다.
“여우가, 부, 불여우가, 산에서, 무덤을 파고, 나를, 쫓아 왔어요!”
간신히 여기까지 이야기를 마친 나는 까닭 모르게 설움이 북받쳐 도로 울어버리고 말았다.
“여우? 산에서 여우를 보았어? 그런 게야?”
나는 바로 그거라며 고개를 주억거렸고 마침내 내가 고생한 이유를 안 할아버지는 내게로 굽히셨던 허리를 슬그머니 펴셨다. 그리고 내가 불여우를 만났다는 뒷산을 바라보시며 흠, 흠 하고 헛기침을 하셨다.
“여우가 쫓아오는 통에 비탈에서 구른 게로구나. 그렇지?”
내 마음을 이리 알아주는 이는 역시 할아버지뿐이었다. 나는 벌게진 눈두덩을 주먹으로 비비며 또 한 번 고개를 주억거렸다.
“우리 귀한 손주를 쫓아 오다니, 그 놈 참 고-얀 놈이로고. 걱정 말아라, 정희야. 이 할애비가 나중에 그 못된 놈을 만나면, 꼬리에 불을 붙여 혼쭐을 내 주마. 어떠냐, 좋지?”
순간 꼬리가 홀랑 타 버린 여우가 할아버지에게 해코지를 하면 어쩌나 하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를 이리 골탕 먹인 녀석의 코를 보기 좋게 납작하게 해 주고 싶다는 마음이 더 간절했다. 꼬리에 불이 붙은 여우가 이리 펄쩍 뛰고 저리 펄쩍 뛰는 모양을 떠올리며, 나는 어린아이처럼 운 것도 다 잊고 벙싯 웃었다.
“가자. 너 안 온다고 할머니 걱정하실라.”
할아버지는 내 어깨에서 다 부서진 지게를 끌어내어 손에 드셨다. 나는 고맙고 든든한 마음으로 할아버지의 옆을 묵묵히 따라 걸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할아버지는 뒷산을 바라보시며 흠, 흠, 하고 헛기침을 하셨다. 그때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헛기침을 하시는 척하며 실은 소리 죽여 웃으셨던 것이다. 평소 짓궂은 장난도 곧잘 치던 내가, 여우를 보고 놀라 산비탈을 굴러 내려온 모양이 못내 재미있으셨던 것이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골려주려 한 얘기를 진짜로 믿고 기겁을 한 것도, 흙투성이가 된 얼굴에 땟국물을 줄줄 흘리며 어린아이마냥 울어댄 것도, 할아버지로선 그 만한 볼거리가 또 없었을 것이다.
그때 그 사실을 알았다면 못내 야속한 마음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할아버지라 해도 웃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짓궂은 골목대장이라 해도 그때 나는 아직 순수한 어린아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렇게 나란히 집으로 향하는 할아버지와 나, 그리고 여우를 만난 뒷산 머리 위로 붉은 노을이 내렸다. 하루 종일을 울고도 여전히 기세가 등등한 매미들의 울음소리가 붉게 물든 뭉게구름을 산 너머로 밀어내고 있었다. 이제 곧 어둠이 내리면 여우가 파헤쳐놓은 무덤에서는 파란 도깨비불이 둥실둥실 떠올라 술 취해 산을 넘던 어른들에게 씨름을 걸어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때 나는 부모님과 떨어져 외가에 살고 있었다. 나의 아름다운 시절, 그 여름의 하루가 조용히 저물어가고 있었다.
다음편에서 계속...
annje37@nspna.com, 안정은 기자(NSP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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