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건웅 한양대학교 경찰행정학과 주임교수

[서울=NSP통신] 염건웅 = ‘2012 서울핵안보 정상회의’가 다음달 26일과 27일간 개최된다.

이번 핵안보정상회의는 세계 평화와 안전을 위한 회의로서 대한민국에서 G20 회의에 이어 선진국 대표로서의 대한민국의 위상을 알릴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전망이다.

핵 안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생소하게 느껴진다. 교통수단의 발달과 국가간 출입의 간소화 등 국가간 경계가 무너지는 상황에서 핵무기와 핵연료의 폭발위협 등 핵의 모든 위협은 한 국가만의 위기가 아니고 전 세계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미국 헐리우드 영화를 보면 핵무기로 세계를 위협하는 테러조직에 맞서 영웅이 등장한다. 영웅은 혈혈단신으로 테러조직과 맞서며 결국 몇 초 남겨놓지 않은 상황에서 핵무기의 폭발을 막는 아슬아슬한 상황을 연출한다.

이 내용은 헐리우드 영화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이다. 현실에서 만약 핵무기의 위협에 닥친다면 전 지구적인 위협으로 다가올 것이며, 핵무기가 폭발한다면 그 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전통적으로 핵이라는 ‘절대무기’는 외교적 수단으로 사용되어 왔다. ‘핵외교’라고도 하는데, 핵무기를 보유한 국가에서는 실제적으로 핵무기를 사용할 의도는 없지만, 그 위협적인 파괴력을 바탕으로 외교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카드로 사용하고 있다.

대표적 국가로는 세계의 패권국가인 미국과 러시아(구 소련), 유럽강국 등이 있으며, 이란 등 중동국가에서도 효과적인 외교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IT강국인 인도도 핵무기 강국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특히 우리와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있는 북한도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 핵(Nuclear Weapon)무기의 발전과정

1. 연금술로의 시작

연금술이라고 하는 것은 오랜 과거부터 인간이 금을 만들기 위한 욕심으로 연구해 왔던 것으로 결코 성공한 적은 없으나 그로 인하여 화학이 크게 발전한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값싼 금속을 가지고 금을 만들기 위해서는 핵변환 과정이 수반되어야 하는데 안전한 핵을 만들기 위한 결합에너지는 일반적인 화학변화로 제공할 수 있는 에너지보다 수백만 배나 크기 때문에, 실험실에서 단순히 끓이거나 가열하는 방법으로는 결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2. 러더퍼드에 의한 최초의 원소 인공변환

러더퍼드는 질소에 알파선을 충돌시켜 산소와 양성자로 변환시키는 실험에 성공했다. 이것은 한 원소를 다른 원소로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공했고 과학자들 사이에서 원자를 바꿀 수 있다는 신념이 싹터 한 원자를 다른 원자로 바꾸려는 실험은 계속 진행되었다.

3. 페르미의 실험실

페르미는 원자에 알파선과 같은 하전된 입자를 쪼이면 핵과의 반발력 때문에 쉽게 핵에 접근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측을 하고 전기적으로 중성인 중성자를 쪼여 원자핵의 변환을 일으키는 실험을 하던 중 원자번호 92의 우라늄에 중성자를 충돌시켜 무언가 새로운 방사성 물질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에 그는 새로이 생성된 이 물질의 본질을 알지는 못했다.

4. 무솔리니의 파시즘

그러던 중 이탈리아는 무솔리니의 파시즘 치하에 놓이게 되고 이탈리아 과학자였던 페르미는 파시즘을 피해 다른 나라로 갈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1938년 그에게 노벨상 수상이 발표된 것을 빌미로 가족들과 함께 이탈리아를 떠날 수 있었고 얼마 후 미국으로 향하게 된다. 아마 히틀러나 무솔리니는 그가 미국의 핵개발에 참여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5. 페르미의 실험이 핵분열임을 확인

독일의 화학자 오토한(Otto Hahn)과 그의 동료 마이트너는 페르미의 연구결과를 확인하는 실험에 몰입하여 우라늄에 중성자를 쪼였을 때 생기는 생성물을 분석하던 중 그 생성물 중의 하나가 우라늄보다 훨씬 가벼운 원소인 원자번호 56의 바륨(Ba)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 핵 쪼개짐 현상의 결과로 생기는 질량의 결손으로 인해 200MeV의 엄청난 에너지가 발생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를 ‘핵분열’이라고 명명했다.

6. 우라늄 핵분열의 폭발물로서의 가능성과 한계성

이 소식을 전해들은 보어는 미국으로 가서 이 연구결과를 알리게 된다. 그리고 컬럼비아 대학에서 직접 실험해본 결과 원자핵은 우라늄 92의 동위원소인 우라늄-235(235U, 원자번호 92)이고 우라늄-238(238U, 원자번호92)은 단지 중성자를 흡수할 뿐이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이 과정에서 생기는 질량차이 때문에 엄청난 에너지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으로 생긴 바륨(Ba, 원자번호 56)과 크립톤(Kr, 원자번호 36)은 극도로 불안정하여 중성자를 내놓게 되는데 이때 생성되는 두 개 이상의 중성자는 두 개 이상의 다른 원자핵과 충돌하여 네 개 이상의 중성자를 만들고 이런 반응이 엄청난 속도로 증식된다. 그러므로 급격한 연쇄반응, 즉 폭발물이 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자연계에서 발견되는 천연 우라늄은 대부분 질량수가 238인 우라늄이고 핵분열을 일으키는 질량수 235인 우라늄은 0.7%정도 밖에 존재하지 않으므로 이를 분리하여 정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에 폭발물로의 실현은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게 됐다.

7. 맨하튼 계획(Manhattan Project)의 시작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계기로 독일이 핵을 개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독일 보다 먼저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페르미를 비롯한 미국의 과학자들은 그 당시 대통령과 직접 상의할 수 있는 영향력을 가진 과학자, 바로 나치를 피해 미국에 망명해 있던 아인슈타인을 찾아 도움을 구하게 된다. 아인슈타인은 핵개발을 서둘러야 한다는 편지를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냈고, 이로써 맨해튼 계획이 시작됐다. 미국이 연합군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전함으로 맨해튼 계획에 엄청난 예산이 투입되기 시작하고 핵무기개발을 실재적으로 총괄하는 부서의 책임자로 오펜하이머가 선정되었다.

8. 플루토늄-239(239Pu)의 발견

우라늄-235외에도 플루토늄-239도 연쇄 반응을 일으킬 수 있고 이 플루토늄-239는 천연에는 존재하지 않으나 천연 우라늄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우라늄-238에 중성자를 흡수시키면 핵변환을 일으켜 얻어진다는 사실도 밝혀지게 된다.

시카고 대학의 한 원자로에서는 페르미가 흑연으로 우라늄의 연쇄반응을 제어하는 연구에 성공함으로 그 부산물로 플루토늄-239가 생성된 것을 확인하게 된다. 이로써 과학자들은 우라늄-235를 추출하고 또 한편으로 플루토늄-239를 생산하는 일에 열중하게 된다.

9. 나치독일의 패망

1943년 들어서 집중적으로 연구된 것은 핵폭탄의 폭파방법이었다. 우라늄-235의 폭파방법에는 문제가 없었으나 플루토늄-239의 폭파방법이 문제였기 때문이다. 또 폭탄을 제조하는 데 필요한 우라늄과 플루토늄의 충분한 물량이 확보되지 않았다.

1994년 5월 7일 드디어 나치독일이 패망하게 된다. 그때까지도 미국은 핵폭탄을 쥐고 있지 못했다. 핵폭탄의 개발이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시작된 것이었지만 엄청난 국가예산이 소모됐으므로 그에 따른 보상 필요했고 핵폭탄 제조는 계속 진행하게 된다. 당시 일본과의 태평양전쟁은 계속되고 있었으므로 핵폭탄 제조의 명분은 그대로 지속되었다.

10. 핵폭탄 개발과 실험

1945년 7월 16일 드디어 미국의 플루토늄-239를 이용한 폭탄의 폭파실험이 성공하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흔히 원자폭탄이라고 부르는 핵무기의 첫 실험이었다.

11. 히로시마 나가사키

포츠담 회의에서 일본에게 핵무기를 쓰기로 결정한 후 연합군은 일본에 대한 최후 통첩을 했고 예상대로 일본은 이를 거절했다. 1945년 8월 6일 리틀보이라고 별명이 붙여진 우라늄-235를 이용한 폭탄이 B-29 폭격기에 실려 히로시마에 떨어졌다. 폭탄을 제조할 만한 충분한 양의 우라늄-235를 추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기에 이 원자폭탄은 미리 실험해 보지 못한 것이었으므로 폭발의 결과는 참혹했다.

이러한 상황에도 일본이 쉽사리 항복하지 않자 미국은 예정했던 대로 두 번째 폭탄을 사용하기로 결정한다. 이미 폭파실험에 성공했던 플루토늄-239폭탄이었고, B-29 폭격기에 실려 나가사키에 떨어졌다. 이 두 발이 인류에게는 유일한 핵무기의 실전사용으로 기록된다.

◆ 핵강압 외교의 시작

핵이라는 '절대 무기'를 손에 쥔 자는 대담해지고 못 가지는 자는 움츠려 드는 것이 이치일까요? 미국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전후 질서를 구상하면서 핵보유 '이전'과 '이후'에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된다. 이는 전후 질서 형성의 중대 분수령이었던 얄타 회담과 포츠담 회담에 임한 미국의 태도에서 잘 드러나게 된다. 핵실험 5개월 전인 1945년 2월에 열린 얄타 회담에서 미국의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은 두 가지 입장을 분명히 했다. 하나는 두 차례나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재무장을 철저하게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당시 미국 내 고립주의 분위기를 감안해 대규모의 미군을 유럽에 장기간 주둔시킬 의사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루스벨트의 태도를 두고 60년 후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얄타 회담을 2차 대전의 발발 원인 가운데 하나로 일컬어지는 '뮌헨 회담'에 비유하면서 맹비난을 가했다.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은 얄타 회담을 대표적인 굴욕외교의 사례로 본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얄타 회담 5개월 후 핵실험에 성공하면서 미국의 태도는 확 바뀌게 된다. 상당 기간 핵독점을 자신했던 미국은 소련과의 협력을 추구하지 않더라도 유럽 방어 전략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일 수 있다고 자신했다. 독일의 재무장과 관련해서도 미국이 핵무기를 갖게 됨으로써 독일이 재무장하더라도 또 다시 도발할 수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미국은 포츠담 회담에서 핵 강압 외교의 서막을 올렸다. 흥미롭게도 그 임무는 국제 외교무대에서 신인이나 다름없는 트루먼(Harry S. Truman)에게 주어졌고, 그의 상대는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독재자 스탈린이었다. 1945년 1월에 부통령이 된 트루먼은 그 해 4월 루즈벨트 대통령이 병사하면서 어부지리로 대통령이 된 인물이었다. 그리고 이때까지도 맨해튼 프로젝트 존재 자체를 몰랐을 정도로 미국 정부의 전시정책결정에서 아웃사이더였다. 그가 느꼈던 당혹감은 딸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드러났다.

'부통령' 트루먼도 몰랐던, 그래서 그가 가장 크게 놀란 일은 바로 맨해튼 프로젝트의 존재였다. 대통령직을 승계한 지 12일 후, 트루먼은 전쟁부 장관 헨리 스팀슨(Henry Stimson)으로부터 극비리에 편지를 받게 된다. “극비 사안과 관련해 저는 가능한 빨리 대통령님께 말씀드려야 합니다” 스팀슨이 말한 극비 사안은 물론 맨해튼 프로젝트의 상세한 내용이었다. 핵 개발 성공이 확실해지자, 스팀슨은 이를 미국의 외교적 카드로 삼고자 했다. 이로 인해 트루먼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새로운 무기를, 그것도 그 자신이 존재 자체도 몰랐던 무기를 들고 스탈린을 상대해야 했다.

인류 최초의 핵실험 ‘트리니티’가 단행되기 하루 전인 7월 15일. 트루먼은 이른바 빅 3, 즉, 자신과 스탈린, 그리고 처칠과의 회담을 위해 독일 베를린 인근 포츠담에 도착한다. 독일 항복 70일 후이자 일본의 패망이 확실해지던 시점이었다.

이 회담은 유럽의 전후 처리와 태평양 전쟁에 대한 연합국의 공동 대응 방안, 그리고 2차 세계 대전 이후의 국제질서를 논의하는 중차대한 자리였다. 그러나 트루먼의 마음 한쪽은 최초의 핵실험이 예정된 미국 뉴멕시코의 사막 죽음의 여정에 가 있었다.

그는 7월 16일 스팀슨으로부터 핵실험이 예상을 뛰어넘는 만족스러운 결과였다는 보고를 받고 안도했다. 트루먼을 수행한 스팀슨은 처칠에게도 핵실험 사실을 알렸다. 핵실험 이틀 후인 7월 18일에 트루먼은 보다 상세한 보고를 접했다. 화구(fire ball)의 섬광은 400km 떨어진 곳에서도 목격됐고, 그 굉음은 80km까지 울려퍼졌을 만큼 엄청난 폭발력을 보였다는 것이다. 엄청난 신무기의 등장에 고무된 트루먼은 포츠담 회담에서 스탈린을 압박하는 카드로 핵무기를 선택하게 된다. 결국 이 수간부터 핵 강압 외교가 시작되었다.

◆ 미국과 구소련의 냉정시대

Cold War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미국과 구소련의 냉전시대에는 핵무기의 중요성을 인식한 양국의 무한 핵무기 경쟁이 시작된다. 더 많은 핵무기, 더 멀리 발사되는 핵무기, 더 성능 좋은 핵무기를 개발하기 위해 양국의 과학자와 국방부는 혈안이 되었고, 그 결실로 냉전시대는 핵무기와 핵 억지력이라는 두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 재래식 무기의 사용보다 핵무기 한방이 갖는 펀치력이 더 강하다는 인식을 양국이 갖고 있게 되면서 벌어진 보이지 않는 차가운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결국 동독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유럽 공산국가가 민주화 되는 과정에서 구소련마저 해체되게 됨으로 냉전시대는 종결되고 미국과 러시아간 핵무기 감축협약을 체결함으로 보이지 않게 진행되었던 핵무기 전쟁이 종결되며 제3차 세계대전의 위협요소가 감소되게 된다.

◆ 핵무기의 종류와 핵억지력의 변화

핵무기의 종류는 다양한데 미·러 본토를 직접 공격할 수 있는 장거리의 핵무기 시스템은 전략 핵무기라고 하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전략폭격기 등이 있다. 냉전시대의 미·소는 복수개별유도탄두(MIRV)를 개발하여 핵미사일의 파괴력을 증강했다. 전장에서의 사용을 목적으로 하는 단거리의 전술 핵무기에는 핵포탄, 핵폭탄, 핵전지 등이 있다.

전략핵과 전술핵의 중간적인 위치에 있는 것이 전역핵무기(戰域核武器)로 1980년대 유럽에서는 전역핵무기(INF)의 배치문제가 큰 정치문제가 되었다. 핵폭발의 효과로서는 폭풍, 충격파, 열선, 방사선이 있으며 전자회로를 파괴하는 전자 펄스(EMP)라는 특수한 효과도 있다.

핵폭발이 일어난 장소나 환경(고공 폭발인지 저공 폭발인지, 수중 폭발인지 지하 폭발인지 등)에 따라 효과가 달라져 핵공격의 결과나 핵전쟁의 양상은 예측 곤란하다고 할 수 있다.

냉전시대의 미국은 서방동맹 방위를 위해 소련에 대해 핵억제 전략을 채용했다. 미·소간의 직접적인 군사충돌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핵억제 전략의 공죄(功罪)에 관한 국제정치학자의 견해는 분분하다.

냉전 종결로 동서간의 대규모 핵전쟁의 위험이 멀어져 미·소 간의 핵군축에 일정한 진전을 보았지만, 현재는 이라크의 핵개발 계획의 발각이나 북한의 핵개발 의혹의 부상 등 제3세계의 핵확산이 우려되고 있다. 1998년 인도, 파키스탄이 잇따라 핵실험을 실행하여 냉전 후의 핵비확산 체제를 동요시키기도 했다.

핵보유국은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여 다양한 핵무기를 개발해 왔지만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피폭 이후 핵무기는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다. 일본은 유일한 피폭국으로서 비핵3원칙을 국시로 하면서 핵군축ㆍ핵폐지를 추구해 왔다.

한편, 1995년에 국무회의에서 결정된 일본의 신방위계획의 대강은 ‘핵의 위협에 대해서는 미국의 핵 억제력에 의존한다’고 되어 있어 미국의 핵우산에 의존하는 방위정책을 계속유지하고 있다.

◆ 스타워즈(Star Wars)로 불리는 MD(Missile Defense)체제의 등장과 핵위협의 감소

영화 스타워즈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MD는 Missile Defense의 약자이며, 적국이 미국 본토를 향해 발사한 미사일을 공중에서 요격해 파괴한다는 미국의 방어전략이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2001년 5월 1일 밝힌 미국의 새로운 미사일방어체제 개념으로 말그대로 공중 또는 대기권을 지나 우주를 거쳐 다시 지구로 들어오는 미사일을 위성시스템과 여러 가지 첨단기계를 사용해 공중에서 미사일을 미사일로 요격한다는 개념이다.

국가미사일방어(NMD)체제가 북한.이라크 등 '불량국가' 들에 의한 소규모 미사일 공격에서 미국 본토를 방위하기 위한 지상방어 시스템이라면, 미사일방어(MD)체제는 미국 본토와 해외 미군기지, 동맹국들을 동시에 방위하려는 것으로 지상·해상·공중 요격시스템이 포함된다.

결국 MD체제의 등장으로 인해 핵 억지력의 비약적 발전을 이루게 된다. 사실 우주에서 요격한다는 것 자체가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이야기고, 실제적으로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 미지수다. 하지만 핵무기의 위협이 국가를 직접 타격할 수 있다는 것인데, 비록 어느 정도의 거짓일지라도 우방국 국민들을 핵위협의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기대심리를 갖게 한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 대한민국과 핵

우리나라는 공식적으로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지 않다. 원자력 발전소는 보유하고 있으나, 그 기술력으로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또한 주변 동북아 강국들과의 외교문제로 앞으로도 핵무기를 보유할 가능성은 없다. 하지만 과거 유신정부시절 박정희 대통령이 핵무기 개발을 추진했다는 설이 있다.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서도 묘사된 내용으로 미국의 유명한 핵물리학자였던 이휘소 박사가 극비리에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핵무기를 개발하려다 사고로 위장한 미국의 음모에 사망하였다는 내용의 소설이다. 또한 박정희 대통령도 대한민국의 핵무기 개발을 우려한 미국 측의 사주를 받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설이다. 사실 음모론은 빠지게 되면 사람의 사고를 바꾸게 된다. 그러므로 설은 설이라고 믿는 것이 합당하며, 비록 우리나라는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지 않지만, 현재로서는 동북아시아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서는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주변 열강 미국, 러시아, 중국, 일본 등과 우리의 주적 북한이 핵무기로 위협하게 된다면 우리나라도 외교적인 측면에서 핵무기를 보유하여 장기적으로는 핵 외교력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 소련 체르노빌과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유출 사고

1. 체르노빌(Chernobyl) 원자력 발전소 사고 (1986년 구소련, 7등급)

1986년 4월 26일에 구소련(현재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발생한 폭발에 의한 방사능 누출 사고입니다. 현재까지 발생한 원자력 사고 중 최악의 사고로 기록되고 있다.

발전소에서 원자로의 가동중단에 대비한 실험을 진행하다가 증기 폭발이 일어나 원자로의 콘크리트 천장이 파괴되어 대량의 방사성 물질이 대기 중으로 누출되었다. 56명이 사망하고, 20만 명 이상이 방사선에 피폭되어 25,000명 이상이 사망했다.

누출된 방사성 물질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러시아 등으로 떨어져 심각한 방사능 오염을 초래했다. 낙진의 80%가 떨어진 벨라루스는 전 국토의 1/4이 출입금지 구역이 되었다. 이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소련이 투입한 비용도 천문학적인 액수여서 결과적으로 소련이 붕괴되는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체르노빌 사고로 주민대피령이 내려져서 주민이 모두 떠나버려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유령도시가 된 곳이 있다. 소련은 ‘안전한 원자력’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와 함께 도시를 계획하여 프리피야트(При?п'ять,Pripyat, 프리피야티)라는 도시를 건설했다.

프리피야트는 약 1만4000가구, 5만 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중소도시로 성장했으나, 현재는 사고로 유령도시가 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오늘날 프리피야트는 텅 빈 아파트와 빌딩들 사이로 수목과 잡초가 무성할 뿐이다. 현재 프리피야트는 접근이 가능하지만 장기간 체류 시에는 매우 위험하다. 또 시내 곳곳에는 체르노빌 사고 당시 떨어져 내린 낙진들을 모아서 묻어놓은 곳이 많아서 가이거 계수기 없이 함부로 돌아다니면 위험한 도시다. 앞으로도 위험한 방사성 원소가 충분히 감소하려면 900년은 걸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2.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2011년 일본, 7등급)

2011년 3월 11일 발생한 도호쿠 대지진과 쓰나미로 인해 이튿날 후쿠시마에서 일어난 원자력 사고입니다. 현재 사고가 진행 중이며 노심용융이 발생하여 세계의 관심과 우려를 낳고 있다. 사건 발생 당시에는 온도나 압력 등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지진과 쓰나미 때문에 전력이 끊어지고 장비들이 망가져서 도쿄 전력이나 일본 정부의 계산과 달리 일이 잘 수습되지 않았다. 게다가 원자로의 수도 6개나 되어서 연속적으로 문제를 일으켰다. 사고 당일 사고등급은 4등급으로 발표되었지만, 사태가 악화되어 국제원자력기구(IAEA)에서 사고 등급을 공식적으로 5등급으로 상향 조정했으며 이후 2011년 4월 12일, 일본 원자력안전보안원은 사고 등급을 최악의 단계인 7등급으로 격상할 것을 발표했다.

인류가 화석연료에 의존하던 에너지자원을 획기적으로 개선시켜준 것이 원자력 발전이었다. 초기 원자력발전을 도입하는 각국 정부는 클린에너지라고 홍보하며, 안정성을 강조했지만 결국 원자력발전은 사고가 발생하면 인류의 재앙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 핵안보정상회의이 필요성과 의미

‘2012 서울핵안보 정상회의’가 서울에서 개최된다는 것은 대한민국의 위상이 그만큼 성장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9·11 이후 핵을 이용한 테러 가능성이 현실적으로 증대되고 있어, 핵물질이 테러집단에 의해 악용되지 못하도록 핵 안보(nuclear security) 강화에 대한 국제적 차원에서 논의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위에서 언급한대로 핵무기의 위협이 아직 존재하며, 원자력발전도 안전하지 못하다.

이에 따라 2010년 4월 워싱턴 핵안보정상회의에 이어 2012년 3월, 전 세계 50여개국 정상 및 국제기구 수장이 참가한 가운데 서울에서 ‘핵안보정상회의’가 개최되는 것은 전 세계가 그 심각성을 구체적으로 깨닫게 된 바람직한 일이라고 보여진다..

2012 서울 핵안보정상회의는 테러집단으로부터 핵물질·시설을 방호하기 위한 국제적 협력방안을 논의하는 안보분야 최대 규모의 정상회의의 위상에 걸맞게 ‘핵테러 대응을 위한 국제적 협력 방안, 핵물질의 불법 거래방지, 핵물질과 원자력 발전소 등 핵관련 시설들의 방호 등’의 주요사안이 심층 논의되길 바라며, 일본 원전 사고로 경각심이 높아진 원자력 안전에 대해서도 각국의 상관관계에 대해 구체적인 논의가 이뤄지기를 기대한다.

원자력은 문명의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도 있지만, 인류를 멸망시킬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하고 금번 2012 서울핵안보 정상회의를 통해 핵과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대한 신뢰가 회복되는 계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염 건 웅(廉建雄) NSP통신 칼럼리스트는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동국대학교 대학원 경찰행정학과 졸업, 공안사법연구소 수석연구위원, 한민대학교 경찰행정학과 초빙교수, 국회 환경노동위원장 정책비서관, 한나라당 6.2지방선거 정책특보, 한나라당 10.26재선거 공보특보를 거처 현재 한국범죄학회 이사, 경찰무술신문 논설위원, 한양대학교 경찰행정학과 주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염건웅 NSP통신 , guncool@nsp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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