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NSP통신) 김종식 기자 =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인해 사상 초유의 경륜 중단 사태가 지속되고 있다. 이에 경륜 마니아들은 오매불망 경기 재개를 기다리며 각종 인터넷 사이트나 SNS 등을 통해 과거 경주 동영상 시청과 선수들의 이야기 등을 보며 지루함을 달래고 있다.
이중 94년 경륜 원년부터 벨로드롬을 지켜보고 분석한 ‘최강경륜’ 박창현 발행인이 ‘경륜에 명예의 전당이 있다면?’ 이란 주제로 소개된 내용이 올드팬들에겐 향수를 자극하고 갓 입문한 새내기 팬들에겐 흥미와 관심을 유발하고 있다.
지난 1994년부터 2002년까지 연도별로 나열한 명단에는 내노라하는 과거 은륜 스타들이 함께했는데 자세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원년 멤버 은종진-허은회
94년 개막한 경륜은 누구에게나 친숙한 자전거를 통해 뿜어져 나오는 스피드와 역전의 역전이 거듭되는 경기 내용이 팬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경륜의 이런 신선함과 호쾌함을 이끌어냈던 1등 공신으론 원년 멤버인 은종진(2007년 은퇴)과 허은회가 꼽힌다.
아마 시절 크게 빛을 보지 못했던 은종진은 사실 부상과 개인사가 겹쳐 많은 시즌을 소화하지 못했다. 하지만 개막 후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국가대표 선배들을 제치며 ‘달리는 보증수표’라는 칭호를 얻어냈다.
성적은 단연 톱이었고 거친 몸싸움도 마다않는 투지나 두뇌 플레이는 당시 선수들과 비교해 소위 ‘넘사벽’ 수준이었다. 이는 은종진만의 성실성과 경륜에 대한 남다른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특히 입상에 실패를 해도 심지어 낙차 경주에서도 객장의 갈채를 이끌어내온 선수로는 지금까지 유일무이하다. 그만큼 경륜 팬들의 관심과 사랑이 특별했던 선수였다.
1기 멤버 중 가장 화려한 아마 경력을 가졌던 허은회(83∼90년 국가대표)는 데뷔 직전까지 실업팀 지도자로 재직한 3~4년간의 실전 공백과 서른이란 적지 않은 나이 탓인지 94년엔 은종진의 그늘에 가려졌었다.
하지만 매일 새벽 훈련은 물론 야간 훈련까지 소화하며 놀랍게도 전성기 기량을 빠르게 회복했다.
허은회는 90년대 초 국내 사이클을 주름잡던 2기 빅 3(원창용, 김보현, 정성기)에도 주눅 들지 않을 만큼의 경기력을 과시했고 특히 사상 최초로 대상 경륜 3개 대회를 연속해 우승하는 금자탑을 쌓기도 했다.
허은회의 장점은 당시 힘으로 윽박지르는 젊은 선수들을 역이용하는 노련한 경기 운영과 특유의 순발력이었는데 이중 반바퀴를 전후할 즈음 기습처럼 후위에서 선두권을 유지한 후 막판 직선에서 승부를 보았던 2단 젖히기나 추입전법은 그야말로 예술의 경지로 지금도 이런 작전을 소화하는 선수는 손에 꼽기 어려울 정도다.
힘은 기본이고 고도의 순발력과 동물적인 순간 판단 등이 조화를 이뤘기에 가능했다는 평가다.
◆2기 빅 3-김보현 원창용 정성기
경륜의 전성기는 대략 1998~2003년까지라는 게 중론인데 이 시작점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 있으니 바로 2기들 그중에서도 빅 3으로 통하는 김보현, 원창용, 정성기다.
아마 시절부터 경륜 무대까지 논스톱으로 직행한 이들은 젊음과 파워를 무기로 순식간에 경륜의 모든 것을 바꿔놨다.
전반적인 시속도 빨라졌지만 단순했던 반바퀴 이후의 승부를 한 바퀴까지 늘려놓았고 지역 연대 대결로까지 양상을 확대시켰다.
그만큼 경기는 더욱 스피디해졌고 전개가 변화무쌍해졌다. 팬들은 이때부터 초반 줄 서기를 예측하는 등 경륜의 묘미 즉 추리하는 즐거움에 빠지게 됐다.
세 선수는 스타일도 제각각이었는데 가장 맏형 격인 정성기가 은종진 허은회와 유사한 추입 젖히기형이라면 원창용은 호쾌한 선행이 주무기였고 김보현은 상대나 상황에 따라 선행과 추입을 적절히 섞어내며 진정한 자유형의 모습을 나타냈다.
경쟁자들을 뒤로 두고 끌고 가는 전법 탓일까? 선행 전문 원창용은 리더십도 남달라 김보현과 함께 지역의 대표 선수로 부상하며 창원·경남을 전국 최강팀의 반열에 올려놓기도 했다.
엄인영, 주광일 듀오가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전인 95~97년까진 거의 이 세 선수가 벨로드롬을 독식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성적과 상금 등 각종 타이틀을 나눠가졌다.
현재는 정성기만 남아있고 원창용과 김보현은 각각 2001년 2016년에 은퇴했다.
◆엄인영-주광일
영원할 것 같은 위 선수들의 활약에 본격적인 제동이 걸리기 시작한 것은 98년도부터다. 물론 그해 그랑프리는 김보현이 접수했지만 시즌 성적이나 내용면에서 위 두 선수의 활약은 눈이 부실 정도였고 철옹성과 같은 창원 연대도 조금씩 틈이 보이기 시작했다.
99년 사상 초유의 연대율 100%를 기록한 엄인영은 결국 주광일과 연대를 이루며 그해 그랑프리까지 움켜쥔다.
두 선수는 또 위의 빅 3(김보현, 원창용, 정성기)와는 다른 스타일의 경기력을 선보였는데 엄인영은 당시 3.50 이상의 고 기어를 사용함에도 순간 파워나 스타트 능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 주광일은 데뷔 초엔 엄인영과 비교해 화려함은 다소 떨어지는 듯 보였지만 어느 위치에서 나서도 막판까지 일정한 속도를 유지했던 게 최대 장점으로 꼽혔다.
엄인영은 99년 이후 올림픽까지 출전하는 등 사이클 인생 최고 황금기를 맞이했지만 귀국 후 원인 모를 슬럼프에 두 차례 큰 부상이 겹치며 2006년 눈물의 은퇴를 해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하지만 엄인영은 온화하면서도 특유의 카리스마로 선후배 관계 역시 돈독했는데 독보적인 성적과 인품을 바탕으로 수도권을 규합하며 수도권이 지역 최강으로 우뚝 서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하게 됐다.
은종진과 함께 어찌 보면 짧지만 굵고 강렬했던 경륜 인생이었고 남긴 족적 역시 매우 컸다. 엄인영은 현재 국가대표 감독직을 수행하며 지도자 생활 역시 성공적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경륜에 명예의 전당이 있다면?’ 시리즈를 예고한 박창현 발행인은 다음 편에서 경륜의 황금 시대를 연 지성환, 현병철, 홍석한 그리고 조호성 선수 등의 활약상을 다룰 예정이다.
NSP통신 김종식 기자 jsbio1@nsp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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